남산맨션에 사는 사람들

남산맨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파트 천국 서울에서 건축가 김수근이 무려 1972년에 호텔로 지은, 올해로 마흔다섯 살 된 남산맨션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남산을 뒷동산처럼 드나들 수 있고, 날씨가 좋을 때면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을 사랑한다.

남산맨션 1년 3개월 차 / 신현호 이윤아씨 부부
맨션에서의 어쿠스틱 라이프

이촌동 한강맨션에 이어 남산맨션까지, 본의 아니게 1970년대 초반에 지어진 맨션들만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는 부부. 남산맨션과의 인연은 운명 같았다. 다른 집 계약을 하루 앞둔 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고 구조도 보기 전에 결정을 해버렸다. “처음엔 되게 우울했어요. 관리를 거의 안 하고 살았더라고요. 누수되는 곳도 많았고 섀시도 바꿔야 했죠. 철거 비용으로 300만원을 예상했는데 700만원이 들 정도로 철거 자체도 쉽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이사를 결정한 것은 이 집의 발전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하는 발전 가능성이란 집값이 얼마나 뛸 것인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취향을 담으면 얼마나 멋지게 변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남산맨션은 부부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살짝 낡은 느낌을 좋아해요. 벽도 완벽하게 도장한 것보다는 지금처럼 울퉁불퉁한 채로 내버려두는 게 마음에 들고요. 거기에 제가 좋아하는 선반을 달고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오밀조밀 올려놓으면 로맨틱한 분위기가 완성되죠.”

낯가림 심한 고양이 네 마리가 함께 사는 부부의 집 곳곳에는 스스로를 ‘목수’라고 소개하는 남편, 가구 브랜드 큐리어스랩 신현호 대표의 손길이 묻어 있다. 벽에 걸린 선반들, 테이블과 서재 벽 전체를 채운 책장, 그리고 주방의 아일랜드 상판도 모두 그의 작품. 집 안 곳곳에 놓인 가구들도 부부의 취향을 보여준다. 거실 한쪽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자개장은 이윤아씨의 외할머니가 물려주신 것이고, 철제 캐비닛은 신현호씨가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것이다. 원래 완전히 막혀 있었던 부엌은 벽을 허물어서 오픈했다.

“마룻바닥과 부엌바닥을 타일로 구분했어요. 부엌 벽도 평소 로망이던 타일로 바꿨고요. 싱크대의 상부장은 떼내고 선반을 달았죠. 주방 벽을 허물었더니 배관이 3개가 나왔는데, 난방 배관이라서 옮기지도 못하고 그냥 놔뒀어요. 남산맨션은 뜯어봐야 속을 알 수 있는 흥미진진한 곳이에요.” 선반만큼 이 집에서 많이 보이는 것은 식물이다. 이윤아씨 말대로 ‘여기가 밀림인 줄 알고’ 자라는 키 큰 식물이 가득하다. 그녀의 인스타그램 해시태그가 왜 ‘#선반과식물이많은집’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채광이 좋다보니 식물이 잘 자라 금세 짙은 초록색으로 변했고, 새 줄기를 뻗어내기도 한다. 식물에 대한 애정은 포르나세티 벽지 위에 열대숲이 어우러진 듯한 화장실에서도 알 수 있다. 패션 편집숍 텐꼬르소꼬모에서 일하는 그녀의 감각이 엿보이는 부분.

남산맨션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매일 달라지는 남산의 풍경을 지켜보는 특권을 누렸다는 부부. 마음 내키면 아무 때나 집을 나서 남산을 한 바퀴 산책하는 것도, 그때마다 코끝에서 맴도는 흙냄새도 부부의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소소한 기쁨이다.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이 이렇게 가까운데도 흙냄새를 맡고 살 수 있는 곳이 서울에 또 있을까요? 장충체육관에서 유턴해서 올라오면 코너를 돌자마자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아요. 청량하고 상쾌하죠. 그래서 저희는 집에 있는 시간을 즐겨요. 주말에도 밖에 나가기보다는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하죠. 이곳에 온 이후로 공간이 삶에 더해주는 힘을 믿게 된 것 같네요.”

남산맨션 3개월 차 / 이재국 김나연씨 부부
남산을 뒷동산 삼아 산다는 것

전형적인 복도식 구조인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또 다른 복도가 나온다. 확실히 여느 브랜드 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다. 손때가 많이 묻은 LP와 책이 가득한 집. 키 큰 식물 뒤로 자리한 벽은 이사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티 한 점 없다. 이곳은 부부와 초등학교 3학년 딸이 3개월째 살고 있는 집. 가족은 거의 8년째 한남동에서만 살아왔다. 이곳에 오기 직전에는 한강 근처, 지금은 남산 근처에 살면서 매일 출퇴근길에 남산 공기를 마신다. 비가 와도 미세먼지 지수가 ‘나쁨’인 요즘 대기 질을 감안하면 서울 도심에서 상쾌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이곳에 산다는 것은 행운이다. “남산을 뒷동산 삼아 산다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잖아요. 매일 생각해도 매일 기분 좋아요. 집에서 나갈 때도 기분 좋고, 퇴근할 때도 기분 좋고요. 하얏트 호텔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그 길도 좋아요.”

부부의 집을 찾았을 때는 늦여름 마지막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날이었지만 남산맨션은 비교적 시원했고, 무엇보다 살짝 부는 바람 끝에 풀냄새가 섞여 있었다. 애초에 호텔로 만든 한 동짜리 건물이라 출입구도 하나다. 호텔 로비의 컨시어지를 연상시키는 데스크는 경비원 한 사람이 지키고 있다. 부부가 남산맨션을 택한 건 문을 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남산맨션만의 독특한 구조 때문. “한남동은 외국인이 많이 살아서 구조가 특이한 집이 많아요. 저희 집이 33평인데 남산맨션 전체에서 이 평수는 다섯 집도 안 된대요. 6년 전에도 한 번 보러 왔는데, 그때보다 더 개성 있는 분들이 많이 살아서 분위기가 훨씬 재밌어졌어요.”

남산맨션의 분위기는 남산맨션 공식 사랑방 보마켓이 책임진다. 아직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주민들과 친해질 계기는 없었지만, 동네 슈퍼에서 2080 치약이 아닌 마비스 치약을 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생경한 경험. 규모는 작지만 스토리텔링이 더해진 와인 코너도 인상적이다. 와인 하나도 《맥베스》에서 주인공이 “와인을 가지고 오너라”라는 대사를 할 때의 그 와인이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집들이를 겸해 놀러온 친구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엘리베이터 층고가 높다는 것. “사실 아파트는 시간이 지나면 어딘지 모르게 낡아 보이고 지루해지잖아요. 그런데 남산맨션은 고풍스러운 멋이 있어요.

각각 평수도 다르고, 옆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보기 전엔 모르거든요. 층마다 같은 건 복도식 구조라는 것뿐이에요. 주인의 취향대로 수리해서 살고 있으니 개성이 넘치죠.” 최근 우편함에는 홈딜리버리 서비스 우편물이 꽂혔다. 멤버십 회원만 입장 가능한 한남클럽의 레스토랑에서 입주민을 대상으로 홈딜리버리 서비스를 한다는 내용의 우편물이었다. 한식이 특히 맛있다는 한남클럽 레스토랑 딜러버리 서비스 메뉴는 갈비찜과 오이소박이 등. 아직 이용해본 적은 없지만 신기한 경험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복도의 그림은 두 달에 한 번씩 바뀐다.

사소한 변화지만 그걸 알아채는 사람들이 있어 관리가 잘 이뤄질 수밖에 없다. 초등학생 딸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정 넘치는 경비 아저씨들.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 “운동 가세요?”라고 말을 건네고, 몇 호인지 말하지 않아도 택배 왔으니 가져가라고 해주는 세심함이 고맙다. “신기한 곳이에요. 다들 남산맨션에 산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공간이 주는 고풍스러움 덕분에 서로 매너를 더 잘 지키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이 공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이전에는 다양한 곳에서 살아보자는 생각이 컸는데, 남산맨션에 온 이후로는 여기서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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