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성태는 끝까지 간다

열심히 살아왔고, 내 것으로 붙잡은 시간은 허투루 흘려 보내지 않았다. 칼에 찔리고 뺨을 맞아도 행복한 배우 허성태는 끝까지 간다.

싸움을 되게 싫어해요. 태생이 평화주의자죠.
어느 조직에서나 불협화음은 있을 수 있지만 좋게 좋게 가자 주의죠.
유부단하게 버틸 수도 있겠지만. 만약 영화처럼 선택해야 한다면 최명길이 그랬듯 모두가 사는 길을 택할 것 같아요.

<남한산성>과 <범죄도시>, 추석 극장가를 장악한 두 편의 영화에 모두 출연했어요. 소감이 어떤가요
꿈만 같습니다. 추석 때 고향인 부산에 가서 어머님 손 잡고 극장을 두 번이나 찾았어요. 명절날, 아들 나오는 영화 두 편을 보신 어머니도 꿈만 같다고 하시더군요.

<남한산성>에서는 충직하고 용맹한 청나라 장수 용골대 역을 맡았다.

두 영화 모두 남자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인데 현장은 어땠나요
영화 색깔만큼이나 현장 분위기도 확실히 달랐어요. <범죄도시>는 액션이지만 코믹이 깔려 있는 영화라 현장도 화기애애했고 서로 연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많이 나눴어요. 소통하면서 만든 장면도 많았고요. 반면에 <남한산성>은 워낙 대선배님들과 촬영한데다 연기도 무게감이 있고 대사량도 많아서 서로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려 조심하는 편이었죠. 저 역시 만주어 대사가 많아 집중하느라 다른 데는 신경도 못 썼어요.

<범죄도시>에서 서로 의견을 나누며 완성한 장면이 많다고 했는데, 예를 들면요
윤계상(장첸)씨가 저를 칼로 찌르는 장면이 생각나네요. 찌르는 동기가 충족돼야 하니까 그 앞 신에서 제가 어떻게 도발해야 찌르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킬까 의논했죠. ‘침을 징그럽게 뱉자’, ‘뺨을 때릴 때 그냥 찰싹이 아니라 모멸감이 느껴지게 고개가 획 돌아갈 정도로 때리자’ 뭐 이런 식으로요. 촬영 전에 제가 한 번에 끝낼 테니까 한 번만 제대로 맞자 그랬는데 계상씨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한 번에 오케이가 났어요.

<남한산성>에서는 만주어 대사 때문에 힘들었을 것 같아요
만주어는 몽골어 교수님께 두어 달 수업도 듣고 발음 교정도 받았어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몽골어 권위자이신데 <최종병기 활>에도 참여하셨죠. NG는 많이 나지 않았는데 송영창, 이병헌 선배님이 같이 찾아온 장면에서는 유독 발음이 안 되더라고요. 여덟 번 정도 계속 NG를 내니까 감독님이 나머지 먼저 찍고 이 부분만 나중에 따로 하자고 하셨죠. 대선배님 두 분이 떡 하고 앉아계시니 긴장이 됐나봐요.

<남한산성>의 연기가 좋았어요.
오랑캐의 장군이지만 캐릭터가 묵직했는데 덕분에 조선의 갈등과 고민도 더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캐릭터 해석은 어떻게 했나요 일단 역사를 좀 들여다보며 연구를 했어요. 역사를 전공한 선배랑, 원작인 소설 《남한산성》의 광팬인 후배한테도 의견을 물었고요. 그 결과 비열한 오랑캐 장수가 아니라 충직하고 용맹한 사람으로 표현하자고 생각했죠. 조선의 입장에서는 악역이지만 청나라 입장에서보면 애국심이 지극한 충직한 신하잖아요. 그런 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이병헌씨와 붙는 장면이 많았는데, 현장에서 본 그는 어떤 배우인가요
천상 배우예요. 멋있을 땐 멋있고, 순수할 땐 순수하고, 또 털털할 땐 털털하고, 유머 있을 땐 유머 있고, 여러 가지 모습이 공존하는, 그냥 배우예요.

대사 합은 잘 맞았나요
그 부분은 좀 웃긴 게, 만주어 대사만 주구장창 내뱉는 제게 선배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성태야,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하. 그래도 뉘앙스는 아니까 그걸 가지고 이어가셨죠. 저야 선배님의 한글 대사를 아니까 큰 문제는 없었고요.

영화의 큰 가지는 명분과 실리의 싸움, 둘의 팽팽한 긴장이에요.
극중 최명길과 김상헌이 부딪치는 지점이기도 한데 사실 살면서 늘 있는 갈등이잖아요? 인간 허성태라면 어떤 쪽을 선택할까요 저는 싸움을 되게 싫어해요. 태생이 평화주의자죠. 어느 조직에서나 불협화음은 있을 수 있죠. 학교에서도 한 과에 학생이 30명이면 거기서 또 패가 나뉘어 서로 싸우고. 전 그런 게 싫었어요. 좋게 좋게 가자 주의죠. 어찌보면 우유부단하게 버틸 수도 있겟죠.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제 나름대로 결단을 내리겠지만 김상헌 같은 뚝심은 없는 것 같아요. 최명길처럼 모두가 살기 위한 길을 택할 것 같아요.

<범죄도시>의 흥행성적도 참 좋아요. 초반에 잔인한 죽임을 당하는 독사 역할은 맘에 들었나요
현장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지 초반에 죽는 역할인 것이 아쉬웠고 지금도 사실 아쉬워요. 하지만 오디션을 본 후 저도 그렇고 감독님도 그렇고 독사 역할이 제 역할이란 걸 알았어요. 초반에 어이없이 죽어서 장첸을 돋보이게 하는 딱 그 역할이죠. 그걸 알았기 때문에 몇몇 장면에선 이수파의 장이수처럼 웃기고 싶었지만 꾹 참았어요.

웃기고 싶은 본능이 있나요
그럼요. 이수랑 사진 찍는 장면, 커피숍 장면 등에서 정말 웃길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 장면에서 웃기는 건 이수 몫이고 저는 무섭게 보이려고 노력했죠.

1000:1 오디션도 화제예요.
오디션을 본 1000명 모두 자기에게 딱 맞는 배역들을 찾은 것 같아요. 분량에 상관없이 역할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배역이 돌아갔죠.

오디션 이야기가 나왔으니, 배우 허성태를 연기의 길로 이끌어 준 <기적의 오디션>을 빼면 안 될 것 같아요.
술기운에 참가 신청을 했다던데 당시를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무작정 시도한 일이었는데 돌아보면 운명적인 순간이었어요.
처음 그 프로그램에 도전할 때는 추석 때 어머님 모시고 제가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가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연기를 하면서, 정말 나한테 맞는 일이다, 잘 선택했다 느낀 순간이 있나요
딱히 떠오르진 않는데, 드라마 속 단역을 맡았을 때, 또 영화에선 처음으로 대사와 감정이 있는 역할을 했던 <밀정> 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보고 나서 나쁜 얘기보다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죠. 그럴 때 내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고생했지만 보람이 있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죠.

헤어 조영재 메이크업 박수연 스타일링 진성훈

가족들은 무조건 내 편이었고 저를 믿어준
버팀목이에요. 가족들은 배우가 되기 전의 제 인생을 알잖아요. 치열하게 노력할 거라는 것,
지기 싫어하고, 내것이라고 생각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믿어준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허성태라는 얼굴을 처음 알린 건, 아무래도 <밀정>의 뺨 맞는 장면일 텐데요.
대본에 없었던 내용을 추가했고 그 부분을 위해 송강호씨에게 3박4일을 부탁했다고 들었어요. 상해에서 합숙하면서 송강호 선배님이랑 태구랑 얘기할 기회가 많았어요. 그런데 송강호 선배님이 그 장면이 고민이 많이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재미없을 것 같다. 대사만 주고받다 끝날 것 같다고요. 그래서 저도 고민을 했는데 뺨을 맞으면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이럴 때가 아니다. 빨리 행동하자”라는 태구의 대사도 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3일 동안 부탁을 드렸고 결국 선배님이 감독님께 전해서 찍게 됐어요.
‘연봉 7천만원의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40에 데뷔한 늦깎이 배우’라는 스토리가 따라 붙어요. 후회한 적은 없나요.
다달이 내는 월세를 걱정해야 했을 때는 포기해야 하나 생각도 했는데 그런 고민이 올라올 때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텼어요.
하지만 그 정도 고생은 저만 한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무명배우들이 안고가야 할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5년 동안 180번 넘게 오디션을 봤다고 들었는데 숫자를 셌나요
대충 세어봤는데 그 정도 되더라고요. 처음엔 엑셀 파일로 정리도 하고 그랬는데 나중엔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관뒀어요. 매일 영화사를 돌며 프로필을 접수했어요. 지하철이랑 버스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그 당시엔 환승 할인이 되는지 안 되는지도 중요했죠.

조선소에서 사무직 일을 하기 전, 러시아에 LCD TV를 판매하는 일도 했다던데 적성에 맞았나요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영업사원 일이 적성에 맞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열심히는 했죠. 배우도 연기하는 순간에야 행복하지 24시간 행복할 수는 없잖아요. 무슨 일이든 이루고 싶은 성과나 목표를 달성했을 때 행복하지 과정에선 힘들고 어려울 수밖에 없죠.

지금의 허성태가 있기까지 지지해준 가족들이 큰 역할을 했겠죠
물론이에요. 처음엔 만류도 했지만 가족들은 무조건 내 편이었고 저를 믿어준 버팀목이에요. 무엇보다 가족들은 배우가 되기 전의 제 인생을 알잖아요. 아내 역시 대학 때부터 절 봐왔고요. 치열하게 노력할 거라는 것, 지기 싫어하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믿어준 것 같아요.

지금,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요
먼저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해요. 저는 그걸 못한 채 시작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주변사람들도 많이 힘들었거든요. 모든 일이 생각한 대로 흐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려움을 최소화하려면 그일을 정말 하고 싶은지 깊이 생각해야 하고, 해낼 수 있는 능력이나 소질이 있는지도 한 번쯤은 검증을 받아야 하고, 끝까지 놓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해요. 그 과정을 생략하고 ‘나는 마흔 넘으면 사표 쓰고 뭘 할거야’ 이런 막연한 생각만으로 시작하면 저처럼 만만치 않은 시간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하하.

배우 이전의 인생과 이후의 인생에서 달라진 점이 있나요
그 전의 인생은 소위 말해 돈을 많이 모아서 효도하고 가족을 돌보고 노후를 준비해나가는 그런 삶이었던 것 같아요. 헌데 지금은 그것만은 아니에요.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노후를 준비하는 건 당연한데 그 외에 투철한 무언가가 생긴 것 같아요. 배우는 단 한 순간이라도 정신을 딴 데 팔면 관객들이 다 알잖아요. 영업사원이라면 이달은 목표달성을 못했지만 다음 달은 해야지, 뭐 이런 실패와 성공의 연속이 반복되겠지만 배우는 무대에서나 카메라 앞에서나 연기를 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고 나면 절대 속일 수도 뺄 수도 없잖아요. 그 점이 가장 긴장되고 치열하게 만드는 요소인 것 같아요.

그 긴장이 좋기도 한가요
엄청난 스트레스예요. 촬영 전에 준비를 충분히 해서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 때는 기대를 가지고 가지만 답을 찾지 못한 채로 현장에 갈 땐 압박감이 말도 못해요. 보는 사람은 다 느끼잖아요. 배우로서의 긴장을 놓치지 않고 몇십 년 한결같이 연기하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드라마 <마녀의 법정>에 출연하고 있고, 좀비가 나오는 퓨전 사극 영화 <창궐>도 촬영 중이에요. 마동석과 함께 나오는 <부라더>, 현빈 주연의 <꾼>은 또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너무 열심히 사는 것 아닌가요
지금 이 시간들을 기다려왔기에 정말 행복해요. 배우로서의 삶을 선택했으니 열심히 살아야죠.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은 기회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아직 목이 마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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