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극한, 자식이라는 혼돈

육아는 환희와 고통이 범벅된 시간이다.
나 자신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몸은 한없이 고되다. 그렇게 시간을 견디고 나면? 어느덧 짐승에서 인간으로 변모한 아이가 똥그랗게 눈을 뜨고 앉아 있다. 마치 혼자 큰 것처럼.

“화가 얼마나 났는지 머리가 하얘져서 애를 질질 끌고 현관에서
목욕탕 앞까지 왔더라고. 정신 차리고 깜짝 놀랐어. 이거 학대 맞지?
상담이라도 받아야 할까?”

13년 차 주부이자 10년 차 엄마인 L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학대야”라고 말할 수도, 그렇다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반성과 자학으로 똘똘 뭉친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육아의 시간은 고 박완서 작가의 말대로 어쩌면 짐승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본능이 튀어나오는 시간. 아무것도 모르겠는 혼돈의 시간. 결혼 후 그림 같은 집, 사랑하는 남자, 예쁜 아기, 이 세 가지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큰 배신과 절망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만 바라보는 어린 생명을 보듬어내야 하다니, 그것은 생의 온 에너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짐승 같은 시간은 어떻게든 버텨나간다 해도 엄마의 애간장은 계속 녹아내려간다. 입시철이 되면 집단 패닉에 빠진 듯 다같이 우왕좌왕이다. 엄마의 정보력이 애들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선정적 문구가 종교처럼 머리에 박혀 있는 데다가 그 레일 위로 올라가면 혼자 힘으로 내려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된다고 달라질까. 학점관리로 시작해 취업알선 그리고 연애와 결혼에 대한 간섭까지. 아이가 생의 전부인 엄마들의 경우 자식을 통한 자아실현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엄마들도 자식의 위치로 돌아오면 180도 바뀐다. “엄마가 현관 번호까지 알고 아무 때나 들이닥쳐. 물론 다 우리 식구 챙겨주느라 그런 거지. 도움을 받고 있으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고, 정말 미치겠어. 멀리 이사라도 가고 싶다니까.” 뿐만 아니다. 스마트폰 화면에 엄마라는 두 글자가 뜨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식은땀이 난다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 엄마가 지긋지긋한 것이다.

대중문화에서도 ‘엄마=희생’ 공식이 깨진 지 오래다. 도리어 왜곡된 모성애가 자식의 삶을 어떻게 갉아먹고 망치는지를 보여주는 데 더 주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봉준호 감독의 역작 <마더>는 아들에 대한 엄마의 과도한 집착, 왜곡된 사랑을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몇 해 전 개봉한 구혜선 감독의 <다우더>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뭔 줄 아니? 너를 낳은 거. 그래서 너밖에 없었던 것.” “엄마 인생은 그게 다니?” 모녀의 날선 대사는 너무 현실적인 나머지 영화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모녀 또는 모자간의 비명이 한국 영화에만 넘치는 것은 아니다. 스페인의 거장 알모도바르는 일생을 바쳐 ‘엄마와의 관계’에 천착해왔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시작된 모성 탐구는 최근작 <줄리에타>에서 정점에 이른다. 아내에서 엄마가 되는 비애와 딸에서 아내가 되는 시련(정성일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을 극한으로 몰아간다. 부모 자식은, 아니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의 마음대로 안 되는 거라는 걸 우리는 얼마나 더 겪어야 알 수 있을까.

자비에 돌란은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에서 대놓고 돌진한다. 제목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나는 엄마가 좋은데, 왜 엄마가 싫을까’ 이 문제로 말이다. 그는 “모자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장 콕도의 말을 인용하지만, 몇 장면 지나지 않아 “나의 모든 기쁨은 당신의 모성에서 시작한다”며 우왕좌왕한다. 엄마도 만만치 않다. “다른 애들도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니?” 끊임없이 반목한다. 감독은 그 후로도 <마미>에서 같은 문제를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는 문제 엄마들이 수두룩하다. 가해자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 <케빈에 대하여>의 서늘함을 떠올려보자. <아이엠 러브>의 엄마는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져 사라진다.
이 문제적 엄마들을 대체 어쩔 것인가. 헌신적이고 사랑 가득한 엄마가 사라진 것은 반갑지만, 한편으로는 다들 왜 엄마만 갖고 난리인가 싶다. 대대손손 희생적인 엄마가 그리 많더니, 언제부터인가 괴물 같은 엄마들이 판을 치고 있다. 뒷받침하는 자료도 차고 넘친다. 책 《대한민국 부모》의 한 구절을 보자.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 위해 공부하는 잘난 아이로 만드는 것, 성적이 떨어지면 슬퍼하는 엄마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는 효자 아이로 만드는 것, 부모의 칭찬과 인정이 사라질까 불안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아이로 만드는 것, 자신이 엄마에게 유일한 기쁨인 것 같아서 외롭고 힘들어 보이는 엄마를 늘 걱정하고 살피려는 속 깊은 아이로 만드는 것, 이것이 모두 아이를 포획하는 방법이다. 자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이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삶의 공허를 느끼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엄마들이 하는 일이 바로 아이를 잘 길들여서 삼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이의 성공으로 자신의 삶을 증명하려는 대한민국 엄마들, 아이를 자기 속으로 우겨넣여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복제물로 만들려는 대한민국 포식자 엄마들의 이야기다.”

맞다.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에게서 독립하는 게 어쩌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때리고, 가출하고, 폭언하는 무능한 아빠도 수없이 많은데 문화적으로 부성은 완벽하게 타자화된다. 부성을 언급하면 그저 진부하게 지나가거나 새로운 소재가 되는 식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엄마는 다르다.
이 태생적으로 내밀한 관계는 서로에게 송곳이 되어 파고든다.
그런데 간과한 게 있다. 이토록 욕을 먹는 게 ‘엄마’지만, 불가능한 것에 집착해서 가장 괴로운 것 역시 이 ‘엄마’ 라는 점이다. 엄마는 괴물이 아니다. 주어진 구조 안에서 허우적대며 실수하는 한 인간일 뿐이다. 그건 엄마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그렇다.

구조가 대대적으로 혁신되기 전에 대안은 없다. (중요한 건 그래서 정치다!) 실수하고 돌이키고, 실수하고 돌아오고, 기도하고, 훈련하듯이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아이 문제의 본질은 결국 부모 자식 관계의 문제이고 그 관계를 풀 열쇠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갖고 있다는 것, 그것이 현 시점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노력하면 변화할 수 있다니.
짐승 같은 시간 동안 자신을 놓아야 하지만 또 절대로 놔서는 안되는 게 엄마의 숙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상심리가 생기고, 그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럴 땐 잠시 멈춰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한창 연애에 빠져 있던 모습을 떠올리면 쉽다. 불가능한 것에 집착해서 행복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작은 아이에게.
아이는 이제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무너지거나 상처받거나 배우며 성장할 것이다. 엄마가 독립하면 아이 문제는 반 이상 해결된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지켜주고 쉬게 하면 된다”고 말은 쉽게 해본다. 세상 모든 관계는 유동적이다. 멈춰서 자기 모습을 보면 보이는 게 있고, 그걸 알면 성장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아이 킬드 마이 마더>에서 잔뜩 화가 난 아들이 이런 말을 내뱉고 돌아선다. “오늘 내가 죽으면 어떡할래!” 돌아선 아들의 등 뒤로 엄마는 “그럼 난 내일 죽을 거야”라고 속삭인다. 자아실현이든 본능이든 강요된 모성이든, 그게 엄마다. 그래서 더 공부해야 한다. 남편은 헤어지기라도 하지, 자식은 그럴 수도 없으니.

box movie list

조이 럭 클럽(The Joy Luck Club, 1993)
– 웨인 왕
불편한 모녀관계를 그려낸 고전 중의 고전. 1940년대 가난을 피해 샌프란시스코로 이민 온 중년 여인들과 딸들의 갈등을 토대로 한 영화다. 체스 대회에서 입상한 딸을 끊임없이 자랑하는 엄마에게 “그렇게 좋으면 직접 해”라며 체스판을 던지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I killed my moter, 2009)
– 자비에 돌란
“나는 누군가의 아들일 수는 있지만 엄마의 아들이긴 싫다.” 영화는 열여섯 좌충우돌 게이 소년 후베르토와 엄마의 티격태격으로 일관한다. 둘의 감정선을 따라가다보면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는 모자 관계에 심장이 저려온다.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린 램지
가해자의 엄마. 이 끔찍한 역할을 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은 가해자 가족에 대한 논의가 조금 일반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시선의 전환이 신선했다. 틸다 스윈튼과 에즈라 밀러의 연기만으로도 가치 있는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 고레에다 히로카즈
애가 바뀌었다. 그것도 유전우월주의자에 가까운 료타에게 벌어진 일이다.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통해 두 아버지의 성장을 보여준다. 허용적인 아버지 유다이의 대사 “아버지란 일도 다른 사람은 못 하는 거죠”와 료타의 절규 “그래도 아빠였어, 되먹지 못한 아빠였지만, 그래도 6년 동안 아빠였어”가 대비된다.

마미(Mommy, 2014) – 자비에 돌란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사랑이잖아.”
“시간이 흐를수록 난 널 더 사랑할거야. 반대로 넌 날 덜 사랑하게 되겠지.”
“언젠가는 엄마도 날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난 늘 엄마를 위해 살게.”
“엄마가 아들을 덜 사랑하게 될 일은 없어.”
이런 대사를 아름다운 화면으로 맛보는 것만으로도 추천할 만한 영화.

줄리에타(2016) – 페드로 알모도바르
“모자란 것 없이 키웠어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 말. 그런데 딸은 왜 사라졌을까.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단편 세 작품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가족의 근원에서부터 문제를 따지고 든다. 기하학적 스토리에 많은 명장면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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