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으로 남은 겨울, 가루이자와 여행

두통이 생길 정도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도 웃을 수 있는 곳은 온천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온천에서 시작했지만 다른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일본 여행. 가루이자와 겨울 여행을 권한다. 

여행의 시작은 ‘여기가 아닌 거기’라는 지점에서다. 서울이 아닌 다른 곳,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모두 여기가 아니라면 뭘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여행을 계획한다. 이런 생각을 기대라고 부른다. 보통 기대는 꽤나 막연한 것이다. 기대란 확정적이지 않고 어렴풋하다. 매일같이 다녀서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곳에 가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그래서 막연을 막연하지 않은 것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행선지, 여행의 행로를 정한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 일찍 추위가 시작됐고, 또 여전하다. 따뜻한 곳에서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모두가 열대의 해변을 바라지는 않는다. 따뜻한 나라가 아니더라도 방법은 있다. 온천 여행이다. 게다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운 바람이 부는 노천 온천이라면 더욱 좋다. 머리는 차갑고 목 아래는 따뜻한 이율배반의 쾌감이 얼마나 중독적인지 경험한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그렇다면 적당한 겨울 여행지는 일본, 거기에서도 니가타에서 시작하는 여행은 괜찮은 선택이다. 다만, 온천에서 끝나고 말면 허무하다. 노곤한 휴식은 몸을 채워주지만 여행은 눈도 채워야 하는 법이다. 다시 니가타에서 이어지는 행선지로 가루이자와를 골랐다. 가루이자와를 베이스캠프 삼아 다닐 만한 곳이 많다.

지난밤 어둠에 감춰져 있던 동네 풍경이
어스름하게 떠오른다. 료칸의 긴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창밖의 아침풍경은 눈 때문에 푸른빛을 띤다.

먼저 니가타는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약 2시간, 차로는 4시간쯤 걸리는 곳이다. 일본 혼슈 중북부에 자리한 동네로 눈이 많이 내린다. 많게는 2미터 가까이 눈이 쌓이고, 다시 봄이 되면 녹아서 대지를 적신다. 풍부한 수량과 너른 땅, 거기에 일조량이 더해져 니가타는 일본에서 쌀을 가장 많이 출하하는 곳이 됐다. 고시히카리의 고장이다. 풍족한 쌀과 맑은 물에 더해서 긴 겨울은 농부에게 주조를 터득할 시간을 허락했다. 바지런한 농부는 일을 찾아서 만든다. 그래서 술은 부지런함의 산물이다. 일본에서 세 번째로 많은 니가타의 사케 생산량과 첫째로 많은 일인당 술 소비량이 이를 증명한다. 니가타의 농부들이 양조 기술자로 다른 지방에 스카우트된 것도 역사가 길다.
니가타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에치고유자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배경지다. 첫 구절은 너무나 유명해서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익숙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짙은 안개로 출발이 지연된 탓에 예정보다 세 시간이나 지나서야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곧장 차를 타고 니가타로 향했지만 오후 4시가 지나자 하늘은 어두워졌다. 어두워진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니가타의 기상 상황이 염려됐다. 이미 니가타 전역의 도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니가타 라이브카메라(www.live-cam.pref.niigata.jp)’에서 눈 덮인 도로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영상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몇 시간이고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얼어붙은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히 눈은 그쳤고 길은 좋다.

사계절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는 료칸 류곤의 정원.

설국이 나타나는 방식

4시간쯤 달리자 니가타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간에츠 터널이 나타났다(신칸센을 이용하면 시미즈 터널을 통과한다). 11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의 터널을 달리는 것은 다른 세계에 대한 기대를 최대로 끌어올린다. 절정처럼 급작스럽게 터널을 벗어나면 압도적으로 온 사방을 에워싸듯 펼쳐지는 모노톤의 풍경.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솟아 있는 하얀 산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목도한 풍경은 니가타가 외부인을 맞는 짧고 강렬한 인사다. 이미 그 풍경 하나에 마음을 풀어헤친다.
간에츠 터널을 빠져나오면 그때부터 내내 내리막길이다.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에 매끄럽게 착륙하듯 니가타에 안착하는 내리막. 긴 터널처럼 긴 내리막길 양옆으로는 방음벽처럼 눈이 높이 쌓여 있다. 설국답게 제설은 완벽하다. 로봇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제설차도 흥미로운 풍경이다. 온천의 나라답게 밤새 도로가 얼지 않도록 도로에 뿌리는 온천수 덕분에 에치고유자와는 수증기에 휩싸인다. 생경한 풍경이다.

눈 덮인 삼나무 숲을 바라보며 뜨거운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다 보면 지복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가와바타가 선사해준 탄성의 여운을 더 느끼고 싶다면 에치고 유자와에 있는 료칸 다카한(www.takahan.co.jp)에 묵는 것도 방법이다. 다카한에는 여전히 가와바타가 <설국>을 집필했던 방이 ‘안개의 방’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돼 있다.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입장료 500엔을 내면 이 방을 구경할 수 있다.
오늘의 숙소는 에치고유자와에서 20분쯤 더 가야 하는 미나미우오누마에 있다. 한적한 시골, 짧은 상점가를 지나 왕복 2차선 도로변에 료칸 류곤(www.ryugon.co.jp)이 자리 잡고 있다. 지방의 촌장이 살았던 집이나 무가의 저택을 이축해서 한데 모아놓은 료칸이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긴 복도로 연결돼 있는 집에는 각각 200년 전 막부시대 사무라이가 살던 집, 230년 전에 지역의 부호가 살던 주택이라는 설명이 곁들여 있다.

저녁 7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일찍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처럼 료칸 안에도 적막이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오늘의 손님을 위해 잔불이 남아있는 이로리(일본의 전통 난방장치로 방바닥에 네모난 구멍을 뚫고 불을 피워놓는 곳) 앞에 웰컴 드링크가 놓인다. 갓 스물을 넘겼을 청년 직원이 짐을 대신 들고 방으로 안내한다. 차갑고 긴 복도가 간에츠 터널처럼 이어지고 그 끝에 설국 대신 안온한 방이 있다. 외부 침입자로부터 주인을 지키기 위한 집의 구조, 방 안 여기저기 시대를 느끼게 해주는 소소한 만듦새가 보인다. 반짝이는 새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쌓여 만든 안온한 분위기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다음에 내릴 큰 눈을 대비해 쌓인 눈을 미리미리 치워놓는다.

청년은 저녁을 언제 먹을지, 내일 아침 식사는 연회장에서 할지 아니면 방으로 가져다줘야 하는지 물은 다음, 자신이 들은 답을 프런트데스크에 가서 전달하고 다시 답을 주러 돌아왔다. 긴 복도를 따라 청년이 왕복하는 사이 시간이 제법 흘렀다. 워키토키나 스마트폰으로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이곳에서는 예외다. 효율보다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것, 사소한 장면에서도 지금 일상을 벗어나 여행 중이란 사실을 목격한다. 방에서 준비된 저녁을 먹고 중정 쪽으로 붙어있는 전실에서 이로리와 함께 놓인 고타츠 속으로 잠시 발을 집어넣고 앉았다가는 유카타와 하오리(방한 목적으로 유카타 위에 입는 소매가 짧은 겉옷)를 챙겨 입고 온천으로 향했다. 방마다 히노키탕이 있지만 노천탕(카시키리 노텐부로)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손님이 온천에 다녀오는 사이 료칸의 직원들은 침구를 펴서 정돈해준다. 다다미 위로 두툼한 요를 깔고 다시 그 위에 커다란 이불을 덮는다. 이불 속에는 뜨겁게 데운 물을 담은 유탄포(물주머니)를 하나씩 넣어둔다. 끌어안고 자면 유탄포의 온기가 아침까지 제법 남는다. 온돌은 없지만 현명한 난방법이다.
평소보다 일찍 깬 여행지에서의 아침. 지난밤 어둠에 감춰져 있던 동네 풍경이 어스름하게 떠오른다. 긴 복도를 따라 이어지는 창밖의 아침 풍경은 눈 때문에 푸른빛을 띤다. 아직 아무도 찾지 않은 온천에 다시 한번 몸을 담그고 돌아와 다음 채비를 하는 우리에게 직원 청년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가루이자와로 간다는 답에 체념 섞인 말이 돌아왔다. “하기는, 여긴 눈밖에 없으니까요.”

다양한 모양을 한 가루이자와의 여름 별장들. 사람이 떠나고 없는 별장 사이를 걷다 보면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다.

가루이자와의 다른 계절

미나미우오누마를 출발해 가루이자와로 이동하는 동안 눈으로 가득 찼던 풍경은 다시 변화한다.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나는 동안 다양한 이름의 온천 간판이 보인다. 시골답게 넓은 면적을 호방하게 차지하고 있는 유니클로 매장도 보인다. 사람이 떠난 지 한참 지났을 법한 빈집들, 90년대 스타일의 간판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상점들도 보인다. 국도를 달리다 죠신에츠 고속도로를 달려서 우스이 가루이자와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면 가파른 산길 하나를 오른다. 그 정상에서 다시 내리막길에 들어서면 잠시 후 가루이자와에 도착한다.
니가타현 남쪽의 나가노현 남동부 아마산 기슭에 자리한 가루이자와는 여름에도 평균 섭씨 25도 이하의 기온을 유지하는 곳이다. 이곳은 해발 약 1000미터의 고원지대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낙엽 지는 침엽수인 낙엽송과 자작나무, 물참나무, 느티나무와 느릅나무, 두릅나무 그리고 겨울이라서 꽃을 볼 수는 없지만 가루이자와를 상징하는 목련까지 다양한 수종의 나무가 도심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신칸센으로 도쿄에서 50분 거리라는 지리적 이점과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온 덕분에 이곳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부자들의 피서지였다. 가루이자와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는 집들은 보통의 주택가에서 보는 집들과는 다르다. 수령 30~40년 이상 됐음직한 침엽수림 사이로 뿌리내리듯 자리 잡은 집들은 다양한 형태와 취향을 드러낸다. 보통의 주택가에서라면 별스럽다고, 너무 튄다고 한소리 들을 법하다. 하지만 나무와 이끼들 사이에서는 특별해 보인다. 가루이자와의 여름 별장들이다. 단순히 별장이라 부르지 않고 여름을 덧붙이는 것은 사람들이 가루이자와의 여름을 편애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겨울이지만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작은 마당에서 바비큐 불을 피우면서 손녀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아버지, 모처럼 몸을 쓰며 앞장서는 아버지를 묵묵히 바라보는 아들. 인적 드문 별장 사이를 걷는 동안 다른 삶의 방식을 떠올리게 된다.

히로시 센주 미술관을 둘러싼 산책로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미술관 실내의 동선이 닮아있다.

빛나는 공간, 히로시 센주 미술관과 페이네 뮤지엄

가루이자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몇몇 공간이 있다. 가루이자와 초입에 자리한 히로시 센주 미술관(www.senju-museum.jp)이 대표적이다. 웹사이트에 실린 사진을 본 순간, 이곳은 이미 가루이자와 여행의 당연한 이유가 됐다.
2011년 일본 화가인 히로시 센주의 작품을 소장 전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관한 이곳은, SANAA라는 이름의 건축 집단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가 단독으로 설계한 공간이다. 그는 여성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와 함께 SANAA를 설립한 후 튀지 않고 순응하는 건축 세계를 구축했다. 우리에게도 가나자와의 21세기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등의 설계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이미 2010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커상을 동양인 최초로 수상한 바 있다. 덕분에 세계 각국의 건축도와 건축가들이 이곳을 찾는다. 벽안의 이방인을 실은 관광버스가 수시로 드나든다.

도로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아 지나치기 쉽다. 길가에서는 낮은 입구가 보이고 건물은 그 뒤쪽으로 낮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형에 맞춰 부드럽게 경사진 형태의 미술관은 마치 랜드스케이프처럼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졌다. 깊게 처마를 내고, 벽은 실버 스크린과 UV차단 유리로 빛을 제어하면서도 가루이자와의 풍경과 녹음, 빛이 실내에 부드럽게 들어오도록 꾸몄다.

중간에 있는 중정으로 자연과 빛을 끌어들인 안온한 공간은 사람을 부드럽게 잡아끈다. 실내에 들어왔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계절의 변화를 또렷이 느끼게 된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그 경사를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관람하게 된다. 마치 숲을 거닐 듯 어슬렁거리다가 기둥처럼 서 있는 벽과 마주하고 거기 걸린 히로시 센주의 작품을 감상한다. 폭포를 섬세한 터치로 그려낸 그의 그림들은 적막한 공간에 상상의 물소리를 더한다. 이 모든 상황은 극히 자연스럽고 조화롭다. 미술관 바깥에 조성된 산책로와 그 산책로를 북미 원산지의 식물로 채워서 컬러 리프 가든(Colour Leaf Garden)이라 이름 붙인 것까지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다.

너른 대지와 호수에 둘러싸여 있는 페이네 뮤지엄은 페이네의 그림처럼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히로시 센주 미술관이 지금 시대에 화가와 건축가의 만남을 보여준다면, 근처에 있는 탈리에신 테마파크는 앞선 시대에도 이런 ‘콜라보’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제자였던 안토닌 레이먼드(Antonin Raymond)가 1933년에 설계한 가루이자와의 여름 주택을 프랑스 화가 레이몽 페이네(Raymond Peynet)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 중이다.

바닥에 깔린 붉은 색 카펫위로 벨벳과 코듀로이로 커버링된 의자와 소파가 놓여 있는 로비. 그리고 8분 음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룸벨과 1950~60년대에 사용됐던 맘페이 호텔의 레스토랑 메뉴 표지 그림이 클래식 호텔의 향취를 느끼게 해준다.

 

맘페이 호텔과 와자와자가 지켜내는 것들

가루이자와에는 존 레넌과 관련한 장소가 많다. 가루이자와에 있는 오노 요코의 별장을 방문했다가 이곳이 마음에 들어 매년 한 달씩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두 사람이 모카소프트를 먹었다는 미카도 커피, 바게트를 자주 사 갔다는 프랑스 베이커리, 블루베리 주스를 자주 주문해 마셨다는 카페 리산보 등 단골 가게들은 여전히 존 레넌의 덕을 본다.


맘페이 호텔(www.mampei.co.jp)에서도 1층의 카페 테라스 입구에 걸린 존 레넌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존 레넌은 1976년부터 1980년까지 해마다 이 호텔에 묵었는데, 1층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서 로열밀크티를 주문했다가 당시 메뉴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만드는 방식을 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메뉴에 오른 로열밀크티에는 ‘존 레넌이 알려준 것(John’s Royal Milk Tea)’이라는 문구가 들어가 있기도. 여전히 가루이자와에 남아있는 이런 존 레넌의 자취를 좇아오는 팬들도 있다.

장작 가마에서 구워낸 와자와자의 식빵.

1894년에 창업해서 12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 호텔은 전신인 가메야 료칸이 1764년에 영업을 시작한 것까지 치면 실제로는 250년 정도 된 호텔이라고 해도 무방한다. 1층에는 호텔과 관련한 사료를 모아놓은 공간이 있는데, 창업 당시부터 쓰던 금고와 의자 등의 가구를 전시해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처음부터 이 호텔에서만 사용하는 의자와 가구를 디자인했다는 점이다. 만페이 호텔은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오리지널리티를 긴 시간 포기하지 않고 지켰을 때 호텔이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다시 가루이자와를 찾을 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하지 않게 만든다.

작은 빵집의 2층 다락방에서는 그릇과 각종 주방 도구도 판매한다.

가루이자와에 기차가 아닌 차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시간을 내서 가볼 만한 곳으로 와자와자(www.waza2.com)라는 가게가 있다. 인스타그램의 팔로워가 2만2000명에 이르고, 최근에는 일본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도 자주 소개되는 곳이다. ‘빵과 일용품을 파는 가게’라는 설명이 붙은 이곳은 가루이자와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도미시 미마키하라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일부러’라는 뜻의 가게 이름처럼 지나다가 생각난 김에 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계획하고 결심해야 올 수 있는 곳이다. 2009년에 점주인 히라타 하루씨가 개업해서 현재 9년째 운영 중이다. 그사이 스태프도 많이 늘어서 함께 일하는 사람만 일곱 명이나 된다. 주변에 농가 주택 몇 채와 너른 밭만 있는 뜬금없는 곳에 간판도 내걸지 않은 빵집이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자동차가 오전부터 끊이지 않는다. 장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입지 조건부터가 일반 상식을 거스르는 이곳의 매력이 무엇인지, 그 궁금증 하나로 찾았다가 빵 맛에 반하고 판매하는 잡화에 반한 사람들이다.

빵집 와자와자 옆으로는 너른 밭이 펼쳐지고 지평선 끝으로 일본 알프스산맥이 펼쳐져 있다

점주의 기준은 단 하나. 음식과 생활 속 여러 면에서 스스로가 진심으로 좋았다고 생각한 물건을 파는 가게를 지향한다. 빵 역시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일반 오븐이 아니라 커다란 장작 가마를 직접 제작해서 사용 중이다. 좁은 가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작 가마가 인상적이다. 직접 발효시킨 효모와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밀과 기름을 사용해 가능한 한 몸에 좋은 먹을거리를 만든다. 빵은 두 종류, 식빵과 캄파뉴만을 만든다. 그 역시 점주 자신이 물리지 않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빵이었기 때문이다. 별것 아닌 기준, 거스른다고 해서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기준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것만으로 인정받고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과 그 환경을 만들어내는 저력이 인상적이다. 아, 물론 빵 맛도 훌륭하다.

지은 지 40년이 넘었지만 요시무라 준조의 산장은 여전히 시대를 거스르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요시무라 준조의 산장 앞에 서다

콘크리트 필로티 위에 목조로 2층을 올린 집은,
존재를 과시하는 주변의 여름 별장들과 달리 질소함을 보여준다. 귀엽고 또 우아하다.

가루이자와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자 하이라이트는 요시무라 준조의 산장 방문이다. 요시무라 준조는 일본의 전통과 모더니즘을 잘 조합한 건축으로 일본 현대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건축가다.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수근의 스승이 바로 그다. <집을 순례하다> 같은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후미도 그의 제자다.
그의 산장에 가보기로 결심한 것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때문이다. 오랫동안 편집자로 일하던 저자는 50대 중반이 돼서야 이 작품으로 늦깎이 작가가 됐다. 인간을 격려하고 삶을 위로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노건축가와 그를 경외하며 따르는 주인공의 아름다운 여름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입사한 설계 사무소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아사마라는 화산 기슭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옮겨 일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별장이 바로 요시무라 준조의 산장을 모델로 한 것이다. 당연히 존경받는 노건축가는 바로 요시무라다. 소설 속에서 ‘고도 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 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짓는 건축가로 묘사된 요시무라의 산장은 어떤 곳인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욕구는 산장을 찾아가기 위한 정보를 찾으면서 더 강렬해졌다.

옛 가루이자와 상점가를 지나서 좁아드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가루이자와 쇼 기념 성공회 교회가 나온다. 교회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고 나면 양 갈래로 갈라지는 숲길이 나온다. 제대로 된 주소 없이 이미 이곳을 다녀온 ‘선배’들이 인터넷에 남긴 사진과 그 길을 비교하며 왼쪽 길을 택했다. 이 숲에 뭐가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때쯤 사진에서 본 것처럼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좁은 오르막 끝에 작은 집이 보였다. 1970년에 지은, 그러니까 지은 지 47년이 넘은 건물이다. 요시무라가 62세였을 때다.
산장 주변으로는 두툼하게 쌓인 낙엽 아래로 가볍게 숨 쉬듯 말랑한 흙이 웅크리고 있다. 축축하면서도 따뜻한 흙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 가루이자와의 공기도 건조해지지만 다시 겨울이 되면서는 낮고 엷은 물기가 공기에 밴다. 일 년에 두 번, 방문객들에게 실내를 개방하지만 겨울의 산장은 덧창까지 굳게 닫혀 있다.
요시무라 준조의 산장은 소설 속 노건축가 무라이의 여름 별장처럼 1층의 콘크리트 필로티 위에 목조로 주거부인 2층을 올린 집이다. 계곡을 향한 1층의 문에는 보통 현관보다 작은 문이 하나 더 있다. 그 문 옆으로는 마치 아궁이처럼 생긴 벽난로가 있다. 삼나무로 외벽을 감싸고 별다른 장식 없는 집은 숲속에 차분하게 앉아 있는 느낌이다. 집의 남동쪽으로는 겨울 동안 마른 강을 향해 짧은 낭떠러지가 있다. 존재를 드러내고 기품을 뽐내는 주변 부자들의 별장과는 확연히 다르면서도 질소함을 잃지 않았다. 덕분에 귀여우면서도 우아하다.
필로티 덕분에 2층에서는 위를 올려다봐도 아래를 내려다봐도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집을 둘러싼 나무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는 듯한 신선한 착각, 아마도 요시무라 준조는 거기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었을 것이다.

안은 들여다볼 수 없으니 인터넷에서 얻은 평면도로 상상해볼 따름이다. 그 상상을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이 돕는다.
“유리창을 열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흘러 들어왔다. 비에 씻긴 초록에서 솟구치는 냄새, 서쪽 하늘이 이상할 정도로 밝아지면서 일몰 직전의 광선을 숲에 던진다. 완전히 황혼에 가라앉아가던 나무들의 잎사귀 가장자리가 오렌지색으로 빛난다.”(<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중)
여름 별장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필체로 묘사되어 있다.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알 수 없지만, 작가와 같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다. 소박한 건물이 남아있고 40년이 지나서도 그 건물을 보며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떠올려 보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 보통의 여행에서는 얻기 어려운 법이다.
요시무라 준조의 산장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올라올 때 급한 마음에 스쳐 지났던 가루이자와 쇼 기념 성공회 교회를 둘러봤다. 성공회 선교사인 쇼를 기념하기 위해 목조로 만든 작은 교회는 5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일본에서도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산에서 작은 돌을 모아서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놓고 기도를 하다 기도를 마치면 돌을 흐트러트려서 증거를 없앴다고 하는데, 가루이자와에 교회가 여럿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세인트폴 가톨릭 교회나 돌의 교회에 가보는 것도 좋다.

선교사였던 쇼를 기념하는 성공회 교회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사람마다 여행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다르다. 하지만 특별하게 기억되는 여행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전에 해보지 못한 경험이다. 일상에서 쉬지 못한 사람은
잘 쉬었을 때, 어디서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맛봤을 때처럼 우리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여행도 그렇다. 가루이자와로의 겨울 여행은 단순한 신체의 감각이 아니라 삶의 감각을 깨워주는 시간이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주인공이 짧게 겪은 여름을 통해 성장하고 29년 뒤에 그 시간을 회상할 수 있었듯 가루이자와에서의 며칠도 그런 기회가 될 것이다. 겨울 여행이지만 다시 그곳의 여름을 기약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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