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라이브러리

책을 빌려 갈 수 없는 도서관이 있다. 미리 예약하고 도서관을 방문하면 열람실에는 책이 아닌, 당신이 처음 보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삶의 반대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미혼모와 난민, 트렌스젠더와 노숙인 그리고 거구의 비만 여성까지 우리가 바라보는 타인의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때로 우리는 종이책을 읽거나 다큐멘터리 영화를 시청하는 것으로 타인의 삶을 공감하려 노력하지만 표면적인 이해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0년 덴마크에서 처음 설립된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된 휴먼 라이브러리에서는 종이책 대신 독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나 경험을 쌓은 ‘사람’이 책이 된다.


독자는 책을 대출해 읽듯 자신이 대출한 ‘사람 책’과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독서를 한다. 휴먼 라이브러리를 처음 창립한 이는 로니 애버겔(Ronni Abergel). 코펜하겐에서 친구가 모르는 사람과 시비 끝에 살해된 사건을 겪고 청소년 비폭력 운동을 진행하던 중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휴먼 라이브러리를 시작했다. “서로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에서는 쉽사리 갈등이 빚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했죠. 결코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마주 앉아 일상적 주제가 아니라 고루한 고정관념이나 오해, 편견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아니 이해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했어요. 그 결과 중립적인 정보 센터이자 사실을 확인하고 배우며 궁금한 정보나 자료를 찾는 공간, 즉 도서관이라는 형식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면 어디든 사람 책 도서관, 즉 휴먼 라이브러리가 될 수 있다. 휴먼 라이브러리의 슬로건은 ‘책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세요(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다. 무슬림, 성전환자, 이민 노동자, 노숙인, 온몸에 문신 가득한 사람처럼 사회 또는 타인의 편견을 경험한 사람 책의 이야기를 선입견 없이 듣도록 돕는다. 창립 후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난민 문제처럼 더욱 복잡한 사회 이슈와 그 중심에 놓인 사람들이 증가함에 따라 더 다양한 유형의 사람 책과 독자가 만나게 되었다.
현재는 덴마크, 영국, 캐나다 등 70개국 이상의 학교와 도서관, 직장, 컨퍼런스 등에서 지역 특색에 맞는 휴먼 라이브러리가 운영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2년 서울 노원에 처음 개관한 이후 서울시립대학교와 국회 도서관 등 전국에서 여러 휴먼 라이브러리가 운영되고 있다. 복직한 기자가 전하는 국내 언론 이야기부터 마을 건축가의 지속 가능한 건축, 고령화 연구 박사의 웰다잉(Well-dying)까지 다양한 사람 책이 휴먼 라이브러리에 가득하다. 다만 국내 분위기상 다양성을 추구하고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사람 책보다는 정보를 전하는 스토리텔러의 비중이 확연히 높은 점은 아쉽다.


도서관 홈페이지를 통해 사람 책 목록을 확인한 뒤 읽고 싶은 책을 예약하면 도서관 측에서 책과의 시간 조율과 공간 대관을 담당해준다. 대출 시간은 대략 30~50분. 사람 책 열람은 1회 1권, 최대 네 사람이 함께 진행할 수 있다. 사람 책을 열람하는 동안 최우선으로 생각할 점은 마음을 다해 듣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더라도 사람 책을 설득하거나 동의를 요구하지 말고 경청해야 한다. 반대로 사람 책이 되고 싶다면? 가까운 휴먼 라이브러리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신청하면 된다. 신청자는 서면 인터뷰 및 사람 책 등록위원회와의 실물 인터뷰와 심사를 거쳐 사람 책으로 등록된다. 이후 나의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독자에게 열람될 수 있고, 휴먼 라이브러리에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도 있다. 다양한 대화 주제를 보유한 사람은 여러 권의 사람 책이 될 수도 있다. 기사를 쓰면서 휴먼 라이브러리에 나를 사람 책으로 등록했다.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어떤 종류의 책이 되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plus!

사람들의 다양성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대학, 도서관, NGO 단체 등의 상시 행사 프로그램으로 진행되곤 한다. 국내에서도 오산, 천안 등 여러 시립·구립도서관에서 휴먼 라이브러리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니 지역 도서관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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