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류, 며느라기

‘아들의 아내를 이르는 말.’ 며느리의 사전적 의미다. 철저히 시부모의 입장에서 붙인 이 대명사 대신 자신의 이름을 찾기 시작한 여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 땅에서 며느리로 사는 것을 당당히 거부한, 이른바 신인류 며느라기들의 시대다.

“나는 며느리를 그만
두었습니다.”

<며느리 사표> 저자 김영주
한국에서 여자가 결혼을 하면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주어지고 많은 여자가 이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며느리 사표>의 저자 김영주 씨도 그랬다. 그녀는 9남매의 장남인 시아버지와 3남매의 장남인 남편이 일군 ‘시월드’에서 23년간 살다 어느 날 돌연 ‘며느리 사표’를 시부모에게 내밀었다. 수십 년 다닌 직장도 정년이 있는데, 왜 며느리라는 굴레는 평생 벗을 수 없는 걸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고, 그녀는 그날 당장 사표를 내기로 결심했다.

최근 책, 영화, 웹툰 등 며느리를 다룬 콘텐츠가 쏟아지고 반응 또한 엄청나다. <며느리 사표>도 그중 하나다. 철저히 나의 개인적인 경험담이다. 나는 2012년 남편에게 이혼을 선언함과 동시에 시부모님께 ‘며느리 사표’를 제출했다. 그 과정과 계기, 그로 인한 삶의 변화를 기록처럼 쓴 글이다. 고맙게도 많은 분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감해주었다. 여자들은 물론, 중년 남자들이 내 책을 읽고 ‘아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할 때 정말 뿌듯하다.

23년간 며느리로, 아내로 충실하게 살다가 갑자기 며느리 사표를 제출했다. 이유가 뭔가?
책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는 딸이다. 아들과 달리 딸은 유독 심하게 사춘기를 겪었다. 아이를 키울 때 주변에 사공이 너무 많았다. 내가 중심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아들이 세 살 되던 해 ‘부모 역할 훈련’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정규 과정을 거쳐 부모 교육 강사까지 됐다. 그런데 막상 내 아이의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강사 일을 잠시 중단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심리학, 꿈 공부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꿈 공부를 통해 내 안에 억눌리고 쌓인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딸은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참고 사는 나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분노를 쌓았고. 내가 변하지 않으면 딸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알게 모르게 나를 억압했던 것들을 내 삶에서 모두 걷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며느리 사표는 일종의 실천이자 결과물이다.

며느리를 ‘그만두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나?
장녀였고, 많은 여자가 그렇듯 ‘착해야 사랑받는다’고 여기며 살았다. 결혼 후에는 8년간 시부모님과 함께 살며 대가족 맏며느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스스로도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다. 분가한 집에서는 남편과 두 아이는 손님이었고 난 집사 역할을 자처했다. 정작 집의 주인은 없었다. 누가 등 떠밀어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선택한 삶이었다. 나 스스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가부장제의 굴레에 갇혀 있었고, 무지해서 그게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2012년 3월 처음 ‘비밀의 방’을 만들었다. 계기가 있었나?
신문에서 고시원을 얻어 글을 쓰는 작가의 이야기를 우연히 읽었다. 나도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집 근처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을 덜컥 계약했다. 하하. 하지만 막상 처음 그 방에 들어가니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편함이 들었다. 괜히 죄 지은 것 같고,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은 생각을 떨쳐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 차츰 그 공간에서 낮잠도 자고, 책도 읽고, 영화도 봤다. 그 공간에 적응한 뒤 주로 한 작업은 글쓰기다. 집의 에너지와 비밀의 방의 에너지는 확연히 달랐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날 방해하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과 나만 남았다.

그렇게 비밀의 방이 생기고 나서 불과 3개월 만에 이혼을 선언했다.
방해하는 것이 없으니 문제에 집중하고 빠르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우선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의 시작인 부부, 그 콘크리트 관계부터 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혼을 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혼하자고 했을 때 남편이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다가 내 결심이 바뀔 것 같지 않자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바뀌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혼을 2년간 유예하는 대신 남편에게 세 가지를 제안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것, 어떤 역할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아내의 사생활을 존중할 것, 부부 상담을 받을 것. 이후 집에서 독립해 각자 분리된 공간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 즈음 대학 졸업을 앞둔 아이들도 독립시켰다. 아이들에게 각각 보증금 600만원과 6개월치 생활비만 보조해주고 이후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같은 해 가을, 추석 이틀 전 시부모님에게 ‘며느리 사표’라고 쓰인 봉투를 내밀었다. 시부모님은 선뜻 ‘아무 때든 편안히 오고 싶을 때 오라’고 하셨다고.
맞다. 더하거나 뺀 것 없이 책에 나온 내용이 다다. 화를 내실 거라 생각했는데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아무런 부담 없이 편한 마음이 들 때 온다면 좋고, 안 와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돌아 나오는데 기분이 홀가분한 것도 아니고 그냥 허무했다. 그동안 나를 가둔 건 가부장제나 시어머니, 남편이 아니라 나 스스로였다는 사실을 그날 알았다. 아내, 엄마, 며느리로서 뭔가 억눌리고 짓눌릴 때마다 힘들다고 말했다면 아마 이 상황까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가족 중 누구도 내가 불행한 걸 원하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친정어머니가 “사돈 어른들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너 그러면 안 된다”고 날 타박했다. 하하.

아무래도 남편과 자녀의 일상이 가장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
가족이 전부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각자 1인분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삼시 세끼 차리는 일부터 청소, 설거지, 빨래까지 각자 몫을 해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남편은 이제 설거지는 기본이고 화분에 물 주는 일까지 빼먹지 않고 한다. 아들은 다행히 졸업하자마자 취업이 돼 비교적 잘 자리를 잡아 살아가고 딸은 아직 취직을 못해 알바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사는 공간은 다르지만 오히려 한 집에 살 때 보다 더 자주 만난다. 딸이 그러더라. “엄마, 나와서 산 몇 달이 꼭 몇 년 같아. 하루하루가 다 생생히 기억나고 애착이 가.” 예전에는 마치 공기처럼 당연히 누리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다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 사람이 희생하고 나머지 사람이 편하면
효율적일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불행하다.
가족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나 자신부터 돌봐야 한다.

부부 상담을 한 뒤 남편과의 관계가 많이 개선됐나?
나보다는 남편이 많이 바뀌었다. 남편은 철저히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나라는 존재에 대해 무시하고 외면한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의 우선순위에 나는 몇 번째일까, 늘 궁금했다. 일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셈이다. 그런데 부부 상담을 하면서 남편이 나를 완벽하게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난 자기니까 내 얘기를 귀담아들을 필요조차 못 느낀 거지. 하지만 이제는 아내는 엄연한 타자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유심히 듣고 배려해야 하는 상대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내가 작년에 무릎 수술을 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다시 집에 들어가게 됐다. ‘빨리 회복해서 다시 독립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들어갔는데, 요즘은 남편이 알아서 자기 몫의 생활을 하니 굳이 나올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 하하. 그동안 내가 했으니 이제는 남편이 해준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 혼자서 자기 몫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명절 풍경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며느리 사표를 내고 2년 동안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간다. 차례 음식은 전부 사고, 제사는 아예 없앴다. 대신 시간이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성묘를 간다. 또 가족이 다 모일 때는 대개 외식을 한다. 그러니 누가 음식을 차리고 손님을 맞이하고 이런 번거로움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명절이나 가족 모임에 가면 나는 으레 주방에 들어가서 밤늦게까지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실에서 함께 얘기를 나누거나 식당에 가면 자연스럽게 ‘요즘 어떻게 지내?’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 선을 그으면 멀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며느리들이 현실에서 조금씩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행복한 며느리, 아내도 분명 있다. 하지만 만약 지금 처한 현실이 힘들고 분노가 쌓여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실체를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굳이 따로 공간을 두라는 것이 아니라 카페든, 공원이든 자신의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날 힘들게 하는 것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종이에 적어라. 그런 다음 더 힘든 것과 덜 힘든 것의 순위를 매긴 뒤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것이다. 단, 관철이 안 됐을 때 좌절하거나 화를 내선 안 된다. 절대 한 번에 개선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한 것에 의미를 두고, “싫어? 그럼 알겠어” 하고 넘겨라. 보통 열 번을 시도하면 서너 번 만에 변화가 찾아온다.

며느리 사표를 꿈꾸는 여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순위에서 나를 자꾸 뒤로 미루다 보면 나는 물론 가족도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남편이, 아이들이 행복하길 원한다면 나 자신부터 행복해져야 한다. 그게 자양분이 돼서 주변을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비행기에서 위급 상황에 대처하는 안내 방송을 들을 때 그걸 더욱 실감한다. 산소마스크를 아이들이 아닌 보호자가 먼저 쓰라고 하지 않나.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보호자가 먼저 마스크를 써야 아이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고부 갈등이 없어지는 날이 올까?”

“며느리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배려와 존중을 받고 싶어.”

영화 <B급 며느리> 감독 선호빈·김진영 부부
“나는 이상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감독의 담담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B급 며느리>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모습에 통렬하게 한 방을 날린다. 영화는 실제 감독의 집에서 벌어진 고부 갈등을 담은 리얼 다큐멘터리이다. 대학교 선후배로 만나 2년간 연애하고 결혼한 선호빈·김진영 씨는 올해로 결혼 7년 차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단순히 결혼 생활이 아닌,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투쟁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견고한 고부 관계에 김진영 씨는 “오빠 부모님한테는 오빠가 효도해”, “왜 날 존중하지 않아?”라며 끊임없이 질문하고 반기를 들었다.

영화의 태생부터 독특하고 재미있다.
김진영 어머니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쓸데없는 진실 공방 때문에 에너지를 소비하기가 싫었다. 분명 진실은 하나인데 각자 기억하는 것이 달랐다. 그러다 문제의 본질은 얘기하지도 못한 채 대화가 끝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내가 남편에게 증거로 영상을 찍으라고 한 것이다.
선호빈 2013년 할아버지 제사 때 처음 찍기 시작해 3년 넘게 촬영했다. 촬영 분량만 700시간이 넘는다. 그런데 연출하고 찍은 것이 아니다 보니 막상 영화에 내보낼 만한 영상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이 카메라를 의식했다. 그래서 몰래카메라처럼 찍은 것도 있고, 카메라 배터리가 나가면 그때서야 본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하하.

영화로 만들기 전까지 가족 아무에게도 영상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뭔가?
선호빈 ‘채증’의 용도로 찍긴 했지만, 그야말로 우리 가족의 암흑사다. 그 안에 행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보여주면 그때 일이 떠올라 다시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당연히 편집하는 나도 너무 괴로웠다. 고부 갈등 때문에 심리 상담까지 받았을 정도다. 심리 상담사가 내 얘기를 듣더니 전형적인 고부 갈등이라고 그러더라. 그 말이 왠지 위안이 됐다. 나만 괴로운 게 아니구나, 남들도 다 고통스럽구나 싶어서.

막상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가족의 동의를 얻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선호빈 나와 진영이는 주변 시선을 개의치 않는 성격이라 괜찮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남들 보기 부끄러운 얘기로 무슨 영화를 만드느냐’는 게 이유였다. 며느리가 시댁에 오지 않는 게 창피해서 남들에게 며느리가 외국에 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분들이니 말 다했지 뭐. 큰아들이 밥벌이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 걱정인 분들에게 “이게 돈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1년 넘게 설득해 겨우 허락을 구했다.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올해 초 1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많은 사람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회자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김진영 그만큼 고부 갈등에 대해 전 세대가 느끼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그 사이에 낀 남편은 또 남편대로 저마다 사연이 있듯이 말이다.
선호빈 관객과의 대화 자리에 가면 영화 얘기보다 본인들 얘기를 더 많이 할 때가 있다. 집집마다 할 말이 정말 많은 소재구나 싶었다. 어머니는 아직 영화를 안 보셨다. 전주국제영화제까지 오셨는데 도저히 못 보겠다고 나가시더라. 관객들은 재미있는데 당사자들이 힘든 영화다. 하하.

처음 고부 갈등을 지핀 계기는 무엇이었나?
김진영 모든 고부 갈등이 그렇듯, 사실 명확한 이유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아주 사소하다. 시작은 아마 전화였던 것 같다. 시어머니는 걱정하는 마음에 하루에 예닐곱 번씩 전화를 하셨다. 그것도 아주 사소한 문제로. 며느리에게 잘 해주시려는 의도는 알았지만 그게 어느 순간부터 일상에 방해가 됐다. 결혼하고 1년 정도는 며느리로서 최대한 맞춰드리려고 노력했다. 난 내가 겪는 갈등이 일반적인 고부 갈등인지, 아니면 내 성격이 독특해서 생긴 일인지 처음에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남편이 “네가 며느리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더라.
선호빈 남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사려 깊은 분이 자식과 며느리에게는 달랐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행동이지만, 가깝기 때문에 더 강압적으로 대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전의 난 부모님과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줄곧 회피했다. 앞에서는 “네, 네” 하고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거다. 그게 삶의 지혜라고 생각했다.

특히 여자들은 출산과 육아를 겪으면서 더 예민해지는 면이 있다. 많은 며느리가 그 시기에 시어머니와 갈등을 겪는 것 같다.
김진영 본격적으로 고부 갈등을 겪기 시작한 것도 아들 해준이가 태어난 뒤부터다. 대부분의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나면 알게 모르게 피해망상을 겪는다. 오로지 아이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아프면 내 걱정을 하기보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돌보니” 물어보고, 배불러서 밥을 안 먹어도 “그럼 젖이 안 나오잖니” 한다. 결혼은 물론 출산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내 삶, 나라는 존재는 하루아침에 사라진 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길 강요받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아내, 며느리 역할만 해야 한다는 메시지 같았달까.
선호빈 며느리를 힘들게 하는 건 육체노동보다는 감정노동인 것 같다. 어른들에게 공손해야 한다, 예쁨 받는 행동을 알아서 척척 해야 한다 등 끊임없이 잘 보여야 하는 존재인 거다. 평생 할 말은 하고 살아온 진영이에게 그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진영 씨의 집안 분위기는 어떤가?
김진영 네 자매 중 내가 둘째고 나머지는 결혼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라’고 가르쳤다. 가끔 아버지가 우릴 혼내거나 지적할 때 “네, 네” 이러면 더 혼내셨다. 차라리 “아빠, 이건 잘못 된 거 아니에요?” 하면 “역시 내 딸, 그렇게 할 말은 해야지” 하면서 기분 좋다고 고기 사주시고 그랬다. 하하. 할 말 못하고 울면 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써서 내라고 했다. 그것 때문에 밤을 새운 적도 있다. 그런 아버지의 양육 방식이 지금의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 나의 아버지가 합리적인가 묻는다면, 글쎄.하하.

고부 갈등을 느끼면서도 유독 밝은 진영 씨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김진영 결혼 후 처음 느낀 건, 지금까지 각자 살아온 두 사람이 서로의 가치관과 의견을 공유하면서 인생을 조율해야 하는데 시부모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남편과 맞춰가는 일보다 시부모님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일이 훨씬 중요한 것처럼 돼버렸다. 가급적 시부모님과 부딪히지 않고, 그분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삶을 꾸리는 것이 내 결혼 생활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싫어서 시어머니와 겪는 갈등이 내 나머지 삶을 갉아먹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 당시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아이와 행복한 추억도 많이 쌓았고,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싫어요”라고 말하는 건, 어머니와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한 나만의 방식이었다.
선호빈 아내가 어느 날 그러더라. 어머니 앞에서 “네, 네” 하는 건 결국 어머니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실제로 나보다는 아내가 더 어머니를 대화 상대로 인정한 것이다. 진영이가 바란 건 배려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낯선 사람이라는 걸 알아주고, 낯선 사람을 대하는 최소한의 매너를 유지해달라는 것이었다. 며느리가 됐다고 하루아침에 본인의 의지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요즘 시어머니들도 할 말이 많다고 한다. 며느리 눈치를 봐야 하는 시대라는 자조 섞인 말도 있다.
선호빈 사실 그 말도 굉장히 폭력적이다. ‘며느리라는 존재는 원래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대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며느리는 우리 집에 처음 온 낯선 사람이고, 당연히 눈치를 봐야 한다.
김진영 난 시어머니가 우리와 정말 가깝고 교류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길 바랐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룰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돌이켜 보면, 어머니는 나에게 없는 장점이 많다. 정이 많고, 상처가 됐던 말들도 사실 악의가 없다는 것도 안다.

요즘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어떤가?
김진영 그때그때 다르다. 하지만 많이 달라진 건 사실이다. 전보다 서로 조심하고 상대를 배려하려고 노력하는 건 분명하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어머니가 직접 내게 전화를 하지 않으신다는 거다. 하하. 나에 대해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많이 노력하신다. 나 또한 감사하고, 노력하게 된다.

고부 갈등을 겪는 많은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김진영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갈등이 있다는 건 기본적으로 그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걸 인정하고 더 건강한 관계를 맺길 바란다.
선호빈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우리 가족에게 아주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비겁하고 우유부단했던 나에게는 그동안 너무도 당연히 여겨왔던 관습을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가 되었고, 어머니에게는 가까운 가족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진영이는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관계 맺기를 통해 좀 더 유연해진 면도 있을 거고.

진영 씨는 여전히 이상한 여자, 이상한 며느리인가?
선호빈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며느리의 모습을 정상이라고 한다면 이상한 게 맞다. 하지만 난 그런 아내가 좋다. 이 이상한 며느리도 언젠가는 당연한 며느리로 받아들여지겠지. 하하
김진영 어른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도 수많은 인간관계 중 하나이고, 다른 관계처럼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하는 기본적인 룰이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앞으로도 한쪽에서만 강요하는 일방적인 관계는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아마 우리 세대가 그 시작이 아닐까.

시어머니와도 보편적인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맺고 싶었다.
갈등은 관계를 좀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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