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대로 만족을 얻는 삶, 와비사비 라이프

없는 대로 잘 살아가고, 덜할 때 더해지는 삶. 겉치레보다 본질에 집중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와비사비 라이프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의 삶은 오래 봐야 예쁘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유행에 뒤처진 낡은 공간이나
물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와비는 단순함, 겸손함,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의미한다. 사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기는
정취를 말하며 시간의 덧없음, 아름다움, 진정함을 의미한다.

와비와 사비라는 말을 합하면 단순하고 겸손하며 알 수 없고
덧없는 것 속에서 조화와
기쁨을 발견하는 정서라는 의미가 된다.

교토에서 가장 일반적인 교통수단은 자전거. 오래된 목조 건물이 즐비한 골목 사이로 장혜인 씨가 지나가고 있다. <와비사비 라이프> – 김영사

식탁을 기록하다
장혜인

장혜인의 와비사비는동네오일장에서 발견한 못생긴 채소
<와비사비 라이프> – 김영사

스무 살부터 12년간 일본의 교토에서 지낸 장혜인 씨는 대학 시절 음식을 함께 파는 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때 자연스럽게 요리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한국에 돌아와서 소박한 집밥을 기록하는 ‘식탁일기’라는 닉네임으로 한국 문화가 더해진 교토의 음식을 기록하고 있다. 교토와 회사가 있는 오사카를 매일 오가며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요리책을 한참 보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던 기억들은 최근 출간한 <맛있는 교토 가정식>에 많은 영감을 줬다.

교토의 오반자이와 한국 집밥은 비슷한 표현인가요?
맛내기나 담음새에서 차이는 있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음식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아요. 다른 점이라면 한국의 집밥은 맵고 강한 양념의 음식이 많은데 반해 교토의 오반자이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간소하게 맛을 내고 조리하죠. 일본 음식 중에서도 교토 음식이 특히 그래요. 육수를 사용해 감칠맛과 깊은 맛을 내고, 반찬을 일인분씩 담아 먹는 것도 그렇고요.

와비사비를 이해하는 데에 교토가 자주 등장해요.
교토만큼 와비사비라는 말이 잘 맞아떨어지는 곳은 없는 것 같아요. 역사 유적지, 교토 사람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오래전에 지어진 집과 건물, 오래된 거리, 고즈넉한 경관 모두요. 교토에서는 오래된 집 앞에 순박한 얼굴의 화초들이 자라고 있고, 매일 아침 화초에 물을 주고 집 앞을 청소하며 집을 가꾸는 집주인의 소소한 일상을 쉽게 만날 수 있어요.

사소한 것을 특별하게 보는 시선, 일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행복을 느낀 경험이 있나요?
아파트에 살지만 소소한 자연을 느끼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봄여름에 싱그러운 연둣빛 옷을 입고 있다가 가을이면 샛노랗게 물들어 집 안까지 노란빛으로 물들여주는 은행나무를 보는 일이나 나무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도 행복이죠. 요즘은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를 아이가 먼저 발견하고 손으로 표현하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생겼어요. 동네 오일장에서 못생긴 채소를 발견하는 것도 소소한 행복 중 하나고요. 건강하고 자연스럽게 자란 것 같아 얼른 사곤 해요.

늘 소유욕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아요.
예를 들어 발뮤다 토스터가 보이면 물론 저도 사고 싶죠. 하지만 빵에 물을 뿌리고 석쇠에 구워 먹는 것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은 아니에요. 오래됐지만 아끼는 석쇠를 사용하는 것도 좋고, 빵이 타지 않게 불을 조절하면서 구워야 하는 불편함도 즐거움 중 하나니까요.

집은 와비사비를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어요.
집에서는 자신이 편하고 즐거울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가장 좋죠. 요리를 즐기는 저는 오일장에서 사온 제철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해요. 베란다의 식물, 가족에게 물려받은 가구들을 소중히 다루며 지내고요. 고리타분한 취향일 수 있지만 내 기준에 만족하고 충실하게 사는 삶이 좋아요.

평소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면요?
가족, 부엌, 자연, 솔직함, 단순함.

우롱티에 생허브를 냉침한 티와 뿌리온더플레이트의 시그너처 메뉴인 치즈가 전혀 안 들어간 비건치즈케이크.

차회로의 초대
이윤서

이윤서의 와비사비는
물성이 맞는
물건을
만나는 것

계동에서 카페 ‘뿌리온더플레이트’를 운영 중인 이윤서 씨. 남편 강대웅 씨는 현미 케이크를 만들고, 아내는 마크로비오틱 요리 수업을 진행한다. 정기 클래스는 물론 원데이 클래스도 열고 가끔은 차회를 마련한다. 채식주의자로 알려진 배우 임수정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현미플레인케이크와 비건치즈케이크는 뿌리온더플레이트의 시그너처 메뉴. 페어링이 트렌드인 요즘 아직은 조금 생소한 티 페어링 시간을 함께했다.

‘차회’라는 말이 참 예뻐요.
묶여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에요. 공간을 꾸리다 보면 운영비 생각을 안 할 수 없잖아요.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카페 영업만 하며 틀 안에서 산다면 제 삶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티를 사람들과 함께 마셔보자는 생각까지 이어졌어요.

낯선 사람들과 차를 마시는 일이 어색할 수도 있잖아요.
물론 처음엔 어색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과 마음이 이완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게 돼요. 어쩌면 가장 가까운 가족, 친구, 연인에게도 못할 이야기를 더 편하게 하기도 해요. 최근 차회에 오신 한 분이 “지금 이 순간은 정말 행복합니다” 하시더라고요.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일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마음에도 생채기가 생긴 채 버티는 날도 있잖아요. 그런데 자신을 위해 마련된 시간을 함께하면 잡념이 사라지고 행복을 느끼게 되죠.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티 페어링은 아직 생소한 것 같아요.
제철 음식을 기본으로 해요. 그 시기에 나는 재료와 차를 메뉴에 반영하고요. 물론 발효차도 있지만 햇차가 나올 때는 꼭 포함해서 나눠 마시죠. 최근에는 차 모임을 자주 마련하고 있어요. 삶에 대한 이런저런 단상을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힘을 주기도 하고요.

와비사비는 뭘까요?
SNS를 통해 타인의 삶이 필요 이상으로 공유되고 있어요. 나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습을 타인과 비교하며 슬퍼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 하는 것을 즐기면서 내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나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조금 더디거나 어설프더라도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게 와비사비라고 생각해요.

공간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게 뭔가요?
동네 분위기가 중요해요. 계동은 예스러움이 남아 있는 곳이라 좋아요. 아직 저희와 딱 맞는 공간을 찾았다고 할 수는 없고 여전히 진행 중이에요. 요즘은 제가 키운 채소로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요.

물건마다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는 것 같아요.
취향이 확실한 편이에요. 아주 낡았어도 제 눈에 아름다우면 비싸더라도 가치를 느끼고 구입해요.
오래된 물건, 나무나 도자기, 스테인리스 재질의 물건을 좋아하죠.

평소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면요?

따뜻한 차, 여행, 치유, 휴식, 텃밭, 가드닝, 오래된 물건, 피크닉, 바구니, 나무, 들꽃, 야생화, 따뜻한 수프, 허브, 신선한 샐러드, 방금 구운 빵, 소박한 살림, 할머니 밥.

주방의 벽. 선반을 달아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둔 유리병을 올려뒀다.

그런 특별한 시선
정나란

정나란의 와비사비는
자연에서
힘을
얻는 시간

전남 담양의 한 마을. 발레를 하는 삼남매는 매일 발레를 배우러 광주까지 간다. 엄마, 아빠가 시간 여유가 있는 날에는 데려다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삼형제가 나란히 꽤 멀리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간다. 거기서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가야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아이들은 그 누구도 “엄마, 오늘은 쉬면 안 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담양의 어느 대안학교에서 근무하는 정나란 씨와 가족이 사는 집을 설계한 정호삼 씨 가족의 이야기다.

이렇게 속이 뻥 뚫리는 집은 처음이에요.
1층은 공간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달았어요. 한옥은 앞으로 들어가도 뒤에 문이 있어서 시야가 확 트이잖아요. 서양식으로 지은 집이지만 최대한 한옥의 장점을 살리고 싶었어요. 2층에도 최대한 창문을 많이 냈어요. 처음엔 남편도 창문이 너무 많다고 말리더니 지금은 더 낼걸 그랬다고 해요.

공간의 구분이 확실하네요.
저는 책 보다가 바로 잠을 자고 싶은데 전에 살던 집에서는 안방이 서재가 돼버리더라고요. 수면의 질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방 하나를 반으로 나눠 잠만 자는 공간, 책만 보는 공간으로 구분했어요.

주방의 아궁이가 가장 눈에 띄어요.
겨울에는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모카포트로 커피를 끓여 마시기도 하고, 음식을 기다리면서 책도 읽어요. 친구들은 이탈리아의 부엌 같다고 하더라고요. 집 지을 때 남편에게 화덕은 꼭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와비사비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정확한 개념을 말하기 모호한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와비사비는 모든 것이 특별하다는 거예요. 유명한 산책로에 가지 않아도 마른 풀, 꽃, 돌멩이는 존재하잖아요. 모두 특별하게 놓여 있고, 세심하게 보면 다 다르게 와 닿아요. 달리 보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세심하게 보면 달라 보인다는 뜻이죠. 어떤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세심하게 볼 수 있는 여유 정도는 갖고 살고 싶어요. 지금도 안타까운 부분이 삶에 허덕일 때 아이들을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을 잘 못했다는 점이에요.
예쁜 아이들을 충분히 예뻐해주지 못했던 게 늘 마음에 걸리죠. 사물도 마찬가지예요. 집 앞에 밭을 만들기 전에는 잡풀만 가득했죠. 아침에 저 풀들을 보느라 창가를 못 떠났어요.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날씨가 흐려도 삐져나온 풀을 보면서 ‘너는 왜 이렇게 태어났니?’, ‘너는 왜 돌멩이니?’ 하고 말을 걸어요. 어떤 경로로 왔든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이면 특별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다 끌어안고 사는 게 큰 의미가 없어서 물건을 채워 넣지 않는 것 같아요.

물욕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요.
아니에요. 하하. ‘반드시 사야 해’ 할 만큼 집착하는 물건이 없을 뿐이에요. 가전제품도 최대한 안 바꾸려고 하고, 물건을 들이기가 어려운 만큼 오래 사용하는 것 같아요.

평소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면요?
풀, 꽃, 식물, 액자, 그림, 나무, 여유, 돌, 피아노, LP,
차, 커피.

가을이 되면 창문 너머로 손을 뻗어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감을 따 먹기도 한다.

무과수의 다락방 집
황다검

황다검의 와비사비는
낯선 사람과
대화하기

연희동의 이층집. 조용한 빌라들 사이에 ‘무과수’ 황다검 씨 의 감나무집이 있다. 2017년 9월에 이사했는데, 빌라의 전체 수리를 앞두고 있어 곧 다시 이사할 예정.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 아쉬울 만한데도 “한여름을 제외하곤 이 집에서 사계절을 다 겪어봐서 다행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살아보는 여행을 하면서 에어비앤비 블로그도 운영했고, 지금은 ‘무과수의 집’이라는 해시태그로 집에서 하루하루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직접 찍은 사진과 글로 남기는 그녀의 기록은 별것 아니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다.

무과수는 어떤 뜻인가요?
길을 걷다가 갑자기 지었어요. 촌스럽지만 안 촌스럽고, 묵직하면서 묵직하지 않은 이름을 생각하다가 떠올랐어요. ‘어루만질 무’에 열매의 과수를 더해 만든 이름인데, 제가 가진 재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어요. 사람을 위로하고 안정을 주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별것 아닌 내가 쓴, 별것 아닌 기록을 꽤 많이 좋아해주셔서 감사하죠.

최근에 ‘무과수의 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모임을 열었어요.
생각보다 많은 분이 초대에 응해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청소를 하면서 창밖의 푸릇함을 손님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첫 번째 손님이 도착했어요. 함께 나눠 먹을 음식과 선물까지 준비해 오셨더라고요.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어요.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라 더 자연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벌써 다음 손님이 궁금해져요.

와비사비는 뭘까요?
공간이든 사람이든 한 번에 다 채워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한 번에 다 채워야겠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힘들어지잖아요. 베를린에서 에어비앤비로 할아버지 집에 일주일 정도 머물렀는데,
그 집의 부엌 찬장 속에 세월이 담긴 그릇이 꽉 차 있더라고요. 그게 세월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니 다르게 보였어요. 이사 가면 버리고 새로 사는 게 아니라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신중하게 구입하고 싶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돼서 찬장을 열었을 때 저와 세월을 함께한 그릇들도 있으면 좋겠어요.

살아보는 여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머무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꼭 가봐야 할 장소에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그 나라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에요. 아침에 아이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지인들 틈에서 빵을 사다 보면 나도 왠지 거기에 사는 사람 같잖아요. 전 계속 떠돌아다녀야 하거든요. 그게 불안정하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옮겨가면서 예쁜 집에 살아볼 수 있어 좋은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한곳에서 오래 사는 건 좋을 것 같거든요. 내가 원하는 집을 골라서 내 스타일대로 꾸며가면서 살면 재밌을 것 같아요.

평소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면요?

음악, 마음, 어루만짐, 초대, 여행, 집, 공간, 글, 기록, 위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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