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평온의 기술

20년간 사회 전반에 쓴소리를 던져온 논객 강준만이 ‘평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평온과 나를 위한 삶의 태도에 관하여.

성장과 평온은 대척점에 있지 않아요.
투쟁, 노력이 사회의 활력을 만들지 않거든요.
내가 평온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모든 게 화합되죠.

명상과 요가, 여행지에서 한 달 살기. 최근 많은 현대인의 관심과 에너지는 외부와의 단절을 통해 내면의 고요를 찾는 데에 있다. 사람들과 뒤섞이지 않으면 마음 앓을 일도 없으니까. 서점 평대 위 신간 ≪평온의 기술≫ 역시 그런 에세이인가 싶었다. 저자가 강준만이다. 지난 20년간 세상에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던 ‘그가 이제 노쇠해진 걸까? 평온이라니!’라는 대중의 기우에 응수하듯, 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평온’을 말한다.

논객, 투사의 이미지 때문일까요? 이번 《평온의 기술》이란 책은 낯설어요.
첫인상의 독재일까요? 첫인상이 참 끝까지 가죠. 지식인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한 게 20년 전 일인데 지금의 저를 당시의 강준만으로 바라보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 모두 제게 달라졌다 말해요. 그저 그 시대가 그 주제를 요구했던 거고 이제 세상이 달라졌으니 또 다른 주제, 다른 생각을 말해야 하죠. 메시지로만 보면 최근의 책들이 더 과격해요. 세월이 흐르고 되돌아보니 정치, 경제보다 근본적인 삶의 방식, 행태가 문제였어요.
평온은 행복에 비해 구체적인 개념이라고 봐요. 조용하고 평안한 상태죠. 개인적으로 ‘조용’을 좋아해요. 걱정이나 탈이 없는, 또는 무사히 잘 있다는 뜻의 ‘평안’은 제가 추구하는 삶과도 같죠. 거친 독설로 남의 평온을 깨왔던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요? 하하. 그로 인해 저 역시 비판, 비난, 악플을 받았고 역으로 평온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죠.

그간 참 많은 책을 썼죠.
‘몇 년 만의 신간’이라고 하면 왠지 작가의 묵힌 에너지가 담겨 있을 것 같잖아요. 저는 일 년에 몇 권씩 책을 내니까 욕을 많이 먹어요. 하하. 제게 책은 저널리즘이에요. 월간지, 주간지가 주기적으로 발간된다고 시시비비를 논하지 않잖아요. 단행본의 형식으로 저널리즘을 시도하는 거죠. 책을 완결체, 작품으로 생각해서 신성시 여기는 분들께는 죄송해요. 저는 책을 볼 때, 생각나는 것들을 적고 밑줄도 긋거든요. 이런 갭이 오해를 부르죠. 책을 몇 권 냈는지 세지 않은지도 오래됐네요. 그저 ‘당대의 현안이 무엇일까?’ 늘 고민하고 쓰죠.

요즘 세상의 속도로는 웬만해선 평온하기 어렵잖아요.
평온에 대한 고정관념이 제일 큰 장애물이에요. 흔히 상처받거나 나이 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하죠. 또 평온과 관련된 책을 많이 읽었는데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무소유의 행복? 부자의 사치스러운 교양일 수도 있겠죠. 스토아학파의 금욕적 평온? 현실은 전쟁하듯 살잖아요. 제가 ‘6.25 멘탈리티’라 자주 말하는데, 우린 제한된 승자만 살아남는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에서 살고 있어요. 대한민국은 민주사회잖아요. 선거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는데, 집단 사기극 같아요. 달라져야 한다는 데에 만인이 동의하면서 정작 달라져야 하는 건 움켜쥐고 있죠. 투표를 통해 우리가 표출하는 욕망이 무엇일까요? 기존의 서열 체계를 중심으로 한 욕망이에요. 위로 올라가기 위해 투표하죠. 평온을 적대시해요. 모두가 낙수효과, 개발독재, 고성장 시대는 끝났다고 말해요. 그 뒤를 이을 새로운 패러다임, 행동 양식이 필요한데 정작 그건 없죠. 기술과 경제는 급속도로 바뀌는데, 의식과 행태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어요. 이걸 바꿀 생각은 없고 시스템만 바꾸려 하죠. 평온은 합리적이고 굉장히 경제적인 태도예요. 우리 사회가 집단적인 평온을 위해 하고 있는 노력이 무엇인가요?

입시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서열화, 경쟁이 만연하죠.
대표적인 게 지방선거 때마다 모든 지방자치단체들이 내거는 서울에 학숙을 짓겠다는 공략이에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서울로 보내려고요. 고등학교 2·3학년이 되어서 성적 때문에 ‘인 서울’을 포기하는 학생과 학부모는 있어도, 유치원 때부터 그러는 경우는 없잖아요.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공약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사요. 저 또한 아이들에게 넓은 경험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학생 개인과 가정이 선택할 문제예요. 공공 영역만큼은 그러면 안 되죠.
평온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주는 작업이 필요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완고해서 충격을 받았어요. 이전에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책을 냈는데, 진보 성향인 사람들 중에서도 불편한 태도를 드러내거나 비판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결국 서열 위로 신분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잖아요. 지방에선 서울로 가야 하고, 조직에선 맨 위를 바라봐야 하고요. 그런 관행으론 지금과 같은 빈부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절대 해결할 수 없어요. 지식인의 역할은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 있죠.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보수, 진보를 막론한 한국 사회의 여전한 신앙이에요. 개천에서 용이 안 난다, 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자는 비판만 가득해요. 저는 그 발상이 잘못되었다고 봐요. 야망 가진 사람은 어련히 알아서 노력하지 않을까요? 그걸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만큼은 만들지 말아야죠.

그럼에도 개인이 평온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개개인이 평온한 마음을 가져야 정책도 바뀌어요. 시대는 바뀌었지만 우리의 철학, 의식, 행태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개발 모델이에요. 여기에 균열을 내지 않고선 사회가 바뀌지 않을 거라고 봐요. 평온이 모든 것의 답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평온은 균열을 내는 방식 중 하나죠. 고성장 시대에는 확률을 외면한 도전도 시도해볼 만했어요. 저희 세대만 해도 몇 군데 직장에 붙어서 골라 취업했거든요. 지금의 ‘헬조선’은 아니에요. 지식인들이 쉬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들도 선뜻 나서기 어려워요. 이런 사회 구조의 수혜자니까요. 저만 해도 남들이 흔히 말하는 ‘평온’을 누릴 만큼의 조건을 가졌어요. 먹고사는 문제에서부터 해방이 되었거든요. 겨우 기본적인 생계 유지를 하는 사람한테 평온을 말할 수 있나요? 제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잖아요. 학생 개개인에게 투쟁하라고 말할 수 있어도, 전체를 놓고 보면 출구가 보이지 않아요. 비정규직으로 박봉을 받으며 서울의 거주비를 유지할 수 없어요. 어려서부터 우리가 주입 받은 인생관은 ‘포기=루저’예요. 포기에 대한 공포증을 심어주었죠. 《포기하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라는 책이 있던데, 아니요. 포기하세요.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요. 사람마다 포기할 수 있는 상황, 사정이 달라요. 포기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엘리트주의, 스펙 사회에서 포기란 쉽지 않잖아요.
내가 옆집, 친척보다 잘되어야겠다는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로 인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여기까지 왔어요. 그 힘 하나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그 공을 무시할 수 없어요. 동시에 서열주의가 유전자화되었죠. 하지만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아요. 사람들 의식 속에 서열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게 갑질이에요. 대한항공, 아시아나 일들 보세요. 그 사람들이 왜 천민자본주의 최악의 모습을 보였겠어요? 그래도 되니깐. 그간 아무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거든요. 서열주의가 무서운 게 남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으로 나를 알아주면 내가 참 치사해져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해지죠. 아주 치사한 근성이에요. 갑질이요? 갑만 나쁜가요? 을은 병에게 을질을 하죠. 병은 정에게 병질을 하고. 전 국민의 갑질이 일상에 패턴으로 녹아든 걸요.

그래서 사회 전반에 파열음이 나는 걸까요?
어떤 현상은 증상이지 원인이 아니에요. 겉으로 드러난 증상의 원인을 봐야 하죠. 국정농단 때를 되돌아보면 저렇게 성공한 사람들이 왜 한 사람에게 순종적으로 복종했을까 싶잖아요. 서열 안에 있으면 사회를 바라보지 않고 위라는 목표만 보게 돼요. 최근에 ‘속한 조직에서 머리가 되고 싶은가’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는 응답이 10%밖에 안 된다며 성장과 생산성을 걱정하는 칼럼을 읽었어요. 개인의 욕망과 사회를 아울러 바라볼 때 그 안에서 균형이 생겨요. 오너의 말에 충성한다고 정답은 아니잖아요. 서열에 종속되는 순간 모든 생각이 굳어요. 성장과 평온은 대척점에 있지 않아요. 요새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열심히 자기 계발을 하다가 휘게, 소확행, 라곰으로 그 절충을 찾거든요. 소확행은 욕망이 거세된 사회상이 아니에요. 투쟁, 노력이 사회의 활력을 만들지는 않거든요. 내가 평온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모든 게 화합되죠.

4차 산업혁명, AI 등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교육열, 입시 경쟁을 조장하기도 해요. 그나마 익히 알고 있는 검증된 방법으로 불안을 돌파하는 거잖아요.
맞아요. 동의해요. 다만 삶을 이끌어가는 가치가 획일화되었다는 것, 이미 정답을 정해두었다는 것이 문제죠. 성공과 야망을 포기하지 않는 동시에, 정답이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아는 게 중요하죠. 뻔한 기준으로 획일화된 사회는 좀 시시하잖아요. 아이의 능력, 잠재력을 가늠하고 정답지를 열어두자는 거죠. 입시, 취업에 몰두해서 성공한 케이스를 자주 접해요. 반대로 부모의 강요 때문에 망가지는 경우도 무시 못하죠. 하지만 그건 쉬쉬해서 우리 귀에 들리지 않아요.
학부모를 비난하는 건 넌센스라고 봐요. 좋은 학교를 나와야 좋은 직장을 가는 게 눈앞에 보이는데 관심과 노력을 모을 수밖에 없죠. 결국 뭐 때문이겠어요? 임금격차예요. 일부 북유럽 국가에서는 대학교수보다 배관공이 돈을 더 많이 벌죠. 노동 강도가 더 강하니까요. 가정을 해보죠. 임금격차가 대졸·전문대졸·고졸의 임금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지금처럼 2~3배가 아니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에요. 그렇다면 입시전쟁이 이렇게 치열할까요? 인생 후반기로 갈수록 그 격차가 더 심해지는데 어떻게 초반에 안 잡을 수 있겠어요. 이걸 바꾸는 데에 큰 장애물은 진보 진영이라 생각해요. 진보 진영의 노동 정책을 보면 대기업 정규직 임금을 기준으로 삼아서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을 그 위까지 올리려고 해요. 결국 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모양이에요. 정규직 임금을 내리진 못해도 동결할 순 있죠. 제로섬게임처럼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직하지 않은 발상이에요.

그렇다면 강준만의 인생에 개인적 평온은 무엇인가요?
욕망 조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저를 더 알아주길 바랐던 30~40대도 있었죠. 하지만 60대가 되고 보니 (앞으로 더 노력은 할 테지만) 지금까지 주어진 평가를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어느 시점에서인가 제 스스로에게 거리 두기를 하면서 평가를 하게 되더라고요. 제 능력이 거기까지인 거예요. 억울할 게 없어요. 부당했던 것, 오해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그러지더라고요. 늙어서 그렇다고요? 늙어서 안 그런 사람도 많잖아요. 하하.

결국 나다운 삶, 사람답게 사는 삶을 고민하는 듯 보여요.
사람답게 사는 방법이라. 그 답은 각양각색이죠. 제 딴에서 방법을 고민해보자면 공존하는 삶 안에서 개인주의적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개인주의와 관련된 책도 한번 쓰고 싶어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오해되죠. 개인주의자인 데도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기준이 똑같은 사람들도 있어요. 그럼 개성이 없죠. 저는 개인주의와 개성이 결합된 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아 있는 개인이 모인 생동감 있는 사회를 꿈꾸죠.

강준만 교수의 연구실을 나서면서 그가 말하는 평온의 핵심, 남과 견주지 않는 오롯이 ‘나를 위한 삶’에 대해 되짚어 보았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 뒤처지지 않으려 페달을 밟던 순간들이 스친다. 기차에 올라 습관처럼 휴대폰을 꺼내 인스타그램에 접속한다. 누군가는 이른 휴가를 떠났고, 누군가는 아이의 첫걸음마에 행복해한다.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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