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60억 인구 중에 누구도 남과 같은 꼴로 사는 사람은 없다. 엄마라는 타이틀도 다르지 않다. 모두 다른 태도와 상황 속에서 아이를 기른다.

“오늘 하루도 행복했니?”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 목수정

“프랑스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Je m’en fous. I don’t care.’예요.
내가 좋아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죠. 학교를 다니는 동안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거예요. ”

한국과 프랑스의 경계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이자 중학교 2학년 딸 칼리를 키우는 엄마. 점점 부모의 품에서 멀어져 자신만의 세계와 관계를 쌓는 딸에게 그저 매일 밤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는지 묻는 일이 엄마로서의 역할 전부다.

칼리가 참 예쁜 아이예요.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예쁜 딸을 키우는 엄마였어요. 꿈을 이룬 셈이죠. 아이 아빠는 프랑스에서 만난 지인이었죠. 석사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칼리 아빠가 한국, 중국, 일본을 여행하면서 재회하게 되었어요. 한국을 여행할 때 제가 같이 다녔거든요.

한국 여행 이후에 결혼을 결심했나요?
아, 아직까지 아이 아빠와 저는 결혼하지 않았어요. 저희뿐만 아니라 칼리 학교 친구들의 많은 부모님이 결혼을 하지 않았죠. 통계상으로 보면 프랑스에는 결혼을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의 비율이 5 대 5예요. 그러니 일상적인 차별도 없고 제도, 사회적인 차별도 없어요. 굳이 결혼해야 할 이유가 없죠. 프랑스의 공식적인 결혼은 증인들과 함께 시청이나 구청에 가서 혼인 신고서에 서명하는 거예요. 성이나 교회에서 세리머니를 하는 건 본인의 자유예요. 오래 함께 살다가 느지막이 결혼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와 아이 아빠는 ‘팍스(PACS)’라는 시민연대계약을 맺었어요. 팍스는 증인, 주례가 필요 없고 두 사람이 시청에 가서 신고만 하면 돼요. 또 합의 과정이 필요한 이혼의 단계가 없어요. 일방적 해지도 가능해서 결혼보다는 가벼운 형태의 결합이죠.

프랑스적인 삶이에요.
한국 사회에선 실현하기 어려운 부모의 모습이죠. 세 식구가 4년 정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살았어요. 이후 제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아예 프랑스에 자리를 잡았죠. 공식적으로 칼리가 프랑스의 공교육을 받을 수 있는 나이기도 했어요. 프랑스에서는 만 3세부터 공교육이 시작돼요. 우리로 치면 어린이집부터 국가가 책임지는 셈이죠.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부모가 원한다면 국가가 제공, 책임져야 하죠. 한국 보육 시스템과 다른 점은 프랑스는 부모뿐 아니라 국가, 지역사회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거예요. 우선 엄마에게 4개월의 출산휴직을 제공하고 이후에 탁아소, 육아휴직 등의 시스템을 통해 아이를 키워요. 이 외에도 보육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 집에서 아이 3~4명을 맡아 보살피는 가정형 소규모 탁아소나 베이비시터 등이 있죠. 이런 제도들 덕분에 저는 일하는 엄마로서의 고충을 못 느꼈어요. 특히 남편은 예술가라 늘 집에서 일하거든요. 육아를 함께 담당해줬어요.

하교 후 엄마, 아빠와 식탁에 둘러앉아 친구, 관심사, 일상 이야기를 늘어놓는 칼리.

프랑스의 많은 부모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나요?
남성들도 출산·육아휴직을 쓸 수 있어요. 출산휴직은 2주밖에 안 돼서 90% 이상의 아빠들이 사용해요. 반대로 육아휴직을 쓰는 비율은 2~3%밖에 안 돼요. 이유는 엄마가 육아휴직을 썼을 때는 급여가 정상적으로 나오는데, 아빠들의 경우 매우 적은 금액이 나오거든요. 반대로 북유럽 국가나 포르투갈은 똑같죠. 1.8~2.0명의 출산율을 보이는 국가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남성의 육아휴직 제도는 미흡해요. 토마 피케티처럼 저명한 경제학자나 유명 운동선수, 작가들이 앞장서서 제도개선을 주장하죠. 우선 출산휴직부터 여성이 16주를 받는 것에 맞춰 남성의 휴직도 8주로 연장하는 것이에요. 또 옵션이 아닌 의무화 제도로 운영하자는 방안도 내놓고요. 사람들이 이처럼 주장하는 이유가 굉장히 흥미로워요. 여성이 16주를 쉬는 동안 직장에서 뒤처지니까 고용주로서는 여성 채용을 고민하게 되잖아요. 또 휴직 기간인 16주만큼 커리어에서 밀리는데, 그런 부당함과 불이익을 여성만 감수할 수 없다는 게 첫 번째 주장이에요. 두 번째는 가족 관계에서의 친밀감이고요. 아이를 재울 수 있고, 젖병을 물릴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자고 말하죠. 참 기특한 생각이에요. 하하.

작가 엄마, 예술가 아빠의 일상은 어떤가요?
아침에 남편이 차로 칼리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줘요. 그러곤 남편은 1층 아틀리에로 저는 2층 작업실로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다, 점심에 만나서 함께 식사를 하죠. 오후에 칼리가 돌아와서 학교에서의 무용담, 수다를 펼쳐놓으면서 저녁을 먹죠. 셋 다 말하는 걸 좋아해서 서로 말하려고 아등바등해요. 종종 칼리는 학교 끝나고 친구네 집에 가요. 거기서 간식을 먹기도 하고, 친구 부모님이 출장 가시면 파자마 싸 들고 가서 자기도 하고요. 불안하지 않냐고요? 아이 안전만 확보되면 괜찮아요. 이동할 때마다 동선을 다 알려줘서 걱정 없어요. 아이들끼리 각자 준비물 맡아서 피크닉도 가고요.

프랑스에서 딸 칼리를 기르며 보고 겪은 것들을 기록한 책 《칼리의 프랑스 학교 이야기》.

한국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입시 때문에 자유롭지 못해요.
프랑스에서는 원하면 대학을 다 갈 수 있어요. 대학 서열에 대한 중압감도 없고요. 또 개개인의 가치가 상당히 분산되어 있고 고등학교 과정까지 등수를 매기지 않아 공부 잘하는 아이가 모든 영광을 독점하지 않죠. 공부 잘하는 건 그 아이의 특징일 뿐이에요. 남과 나를 비교하는 시스템 자체가 없으니 아이들의 우정이 순수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칼리 또래의 한국 아이들을 볼 때 어떤가요?
저도 같은 시스템 속에서 자랐으니까요. 문제는 어려서부터 낙오되는 아이들이 생길 만큼 더 심하게 과열화되었다는 거예요. 등수에 의해서 아이들의 서열이 나뉘기 때문에 남이 나에게 부여하는 가치가 중요해지는 거죠. 프랑스는 반대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Je m’en fous. I don’t care.’예요. 내가 좋아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뜻이죠. 학교를 다니는 동안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거예요. 학교 시험은 모두 서술형인데 교사가 답안지의 틀린 철자는 고쳐주고, 좋은 표현에는 밑줄을 그어줘요. 만약 20점 만점 시험에 다섯 문제가 나오면, 한 문제당 4점이 만점인 거잖아요. 하지만 교사들이 아주 잘 쓴 답안에는 5점, 6점도 줘요. 그래서 20점 만점에 21.5점, 22점이 나오기도 해요. 마이너스나 소수점으로 점수를 주는 교사도 있어요. 어떻게 보면 질문, 답, 채점 모두가 주관적인 거죠. 12년 동안 주관을 묻는 시험을 보니깐 아이들은 주관이 뚜렷해질 수밖에 없어요. 동시에 서로를 매우 존중해요. 가치가 하나면 모두 한곳에 줄을 서느라 정신이 없는데 가치가 분산되니깐 박이 안 터지는 것 같아요.

그런 환경에서 자란 칼리는 어떤 아이인가요?
행복하고 평화로운 아이예요. 또 생명을 사랑하죠. 사소한 벌레, 거미 하나도 죽이지 못하죠. 그런데 칼리뿐 아니라 또래 친구들이 전반적으로 그래요. 미신 같지만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 이 신인류가 지구의 급박한 환경문제를 본능적으로 알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칼리가 여섯 살 때 남편 작업실에서 우연히 공장식 축산과 관련한 유튜브 영상을 몇 초간 보고는 1년 정도 채식을 했어요. 지금은 공장식 축산물은 먹지 않아요. 제가 마트에서 혹여라도 집으려고 하면 “집지 마, 엄마. 먹지 않아도 돼”라고 말해요. 친구들 중에도 비건인 아이들이 있어서 함께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포기하고를 반복하더라고요. 또 편견이 없어요. 남편은 남자고 유럽인, 저는 여자고 아시아인이니까 제 시선에는 세계사적으로 제가 약자예요. 그래서인지 간혹 의견이 부딪힐 때면 저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려, 지지 않으려 애를 쓰죠. 그럼 칼리는 가족의 입장에서 “아빠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약자야”라며 저한테 너무 나쁘다며 중재를 해요. 저희 세 가족을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보는 거죠.

칼리가 어떻게 자라길 바라나요?
자기 주관을 지니고 자유롭게 또 행복하게 살길 바라요. 곁에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두고요. 모녀 사이요? 각자의 독립적인 영역, 또 열정을 갖고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60점짜리 엄마가 어때서요?”
난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 김경림

“처음에는 아이가 내 인생에 많은 걸 가르치러 온 선생님인 줄 알았어요.
지금은 선물? 생활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데 계속 자라요.
자라나는 생명이 옆에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잖아요.”

10년간 육아 전문 기자와 편집자로, 11년간 언어치료사이자 상담사로 일했다. 엄마 경력 20년 차, 누구보다 똑 부러지게 아이를 키웠을 것 같은 그녀가 말한다. “평균 60점짜리 엄마면 충분하다”고.

엄마 이전에 육아, 아동 전문가로 커리어가 화려해요.
10년 정도 육아 잡지 기자, 육아서 편집자로 일했어요. 일하면서 아이도 둘이나 낳았죠. 육아휴직을 쓰기 어려운 상황이라 장기적으론 이 일을 하기 어렵겠구나 싶었어요. 그러던 중 2002년에 아이 언어 발달에 대해 취재하다가 만난 전문가의 소개로 언어병리학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저의 성향이나 취향은 고려하지 않았고 현실적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기에, 또 나이가 들수록 연륜이 쌓이는 일이기에 선택했죠. 사회생활을 하다가 학교로 돌아가 어려운 공부를 하려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마침내 대학원도 졸업하고 아파트도 분양받아서 이사를 했어요. 열심히 살아온 날에 대한 보상 같았죠. 그러곤 얼마 안 지나 아홉 살이던 첫째 아이가 겨우내 감기처럼 열도 나고 식은땀도 흘리면서 아픈 거예요. 두세 달 동안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어느 날 아이가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다시 병원을 찾았고 뇌에서 4개의 종양을 발견했어요. 5년 생존율이 5%밖에 안 되는 중추신경계 림프종이란 희귀암이었어요. 그때부터는 제 인생의 다른 책을 읽게 되었죠.

현서의 스무 번째 생일 날.

가족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겠어요.
항암 치료는 일주일 단위로 이뤄져요. 치료가 끝나면 아이 체력이 바닥을 치죠. 또 회복하고 일주일 입원하는 생활을 반복하죠. 10차까지 치료를 했어요. 둘째한테 너무 미안한 데도 물리적으로 첫째 아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저녁 7~8시까지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두면서 든 생각은 ‘그러면 안 되지’보다 ‘늦게까지 봐주는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였어요. 그렇게 1년의 항암 치료를 하고 지리산으로 내려갔어요. 치료를 끝낸 이후에도 아이의 투병이, 죽음이라는 어둠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치료 중에 감염이 생겨서 죽는 아이도 보았고요. 죽음이 참 생각보다 갑자기 찾아와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이게 길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래서 최대치로 살아야겠다 싶었어요. 그 생각을 하니 아이 학교, 나의 커리어, 남편의 직장이 안 중요해지는 거예요. 지리산에서 지금까지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아예 안 했어요. 생계도 뭐라도 하면 되겠지 싶었고.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때가 3월이었는데 온 가족이 이삿짐을 싸서 꼬불꼬불한 지리산을 지나던 모습, 눈이 내리던 첫날 함께 잠들던 모습 같은 것들이요. 서울에서 차원이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간 느낌이었어요. 막연하고 불안했지만 가족이 모여 있어서 좋았어요.

그 행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나요?
아니요. 3년 지났을 때 아이가 백혈병이 재발했어요. 그래서 다시 이산가족이 되었어요. 백혈병은 한 달 단위로 치료를 받아요. 그러니까 지리산과 서울을 오가며 통원 치료를 할 수도 없었죠. 지방의 환자들이 항암 치료를 위해 서울에 오는 동안 머무는 쉼터가 있는데 거기서 첫째 아이랑 제가 살게 되었고 남편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다른 곳에 거주지를 마련했어요. 친정어머니가 지리산으로 내려가서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둘째를 돌봤고요.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급박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아이에게 맞는 조혈모세포를 구하느라 해외까지 나가야 했거든요. 이후엔 남편이 퇴직했고, 집도 새로 지었어요. 늘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래도 안정되었으니 이전의 제 삶과 거리를 두고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도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형 키를 훌쩍 넘긴 둘째 민서와 아픈 시기를 지나 작지만 단단해진 첫째 현서.

뻔뻔한 엄마가 되라는 조언은 좀 의외인데요.
평균 60점짜리 엄마면 충분해요. 아이에게 집중적인 도움과 관심이 필요할 때도 있어요. 근데 그게 강박이 되면 아이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엄마도 지치죠. 그렇다고 100점이 되는 것도 아닌데. 첫째가 시신경 위치에 종양이 생겨서 방사선으로 그 부위를 지져내느라 시각장애가 생겼어요. 각막, 안구 자체는 건강하지만 회복은 안 되는 거죠. 저한테 각막 이식, 망막에 관한 정보를 주는 사람이 많아요.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시도할 수 없는 것들이죠. 어떤 엄마가 제게 “아이가 보잖아”라고 말했던 게 마음에 남아요. 아이가 시각장애 6급이었는데 점점 나빠져서 지금은 2급이에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아이가 어떻게든 세상을 보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현실이 재앙이라고 생각하면 내 상태가 너무 부족하고 불행해요. 설령 나는 불행할지 몰라도 아이가 안 불편하다고, 괜찮다고 하는걸요. 지레짐작해서, 또 밖의 정상, 100점이라는 기준에 휘둘려서 아이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쉽지 않다고들 해요.
주변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들리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다는 건,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니까요. 그게 제가 지리산으로 간 이유기도 해요.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자신이 없었어요. 그렇게 안 산 사람도, 그런 욕심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요. 지리산은 벽지라서 삶 자체가 달라요. 서울에선 뭐만 하면 돈이 드는데, 거긴 소비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없어요. 카페가 없으니까 누굴 만나고 싶으면 ‘우리 집으로 와, 차 한잔 마셔’라고 말하죠. 수확한 채소를 이웃과 나눠 먹고. 한 달에 한 번, 40분 차 타고 가서 다이소에서 ‘탕진잼’ 하는 게 전부예요. 둘째는 다섯 살 때부터 10년 동안 지리산에 살았잖아요. 용돈을 주면 “엄마 나 쓸데가 없어”라고 해요.

희귀암에 걸린 아들의 완치와 재발을 지켜보며 또 언어치료사이자 상담가로 일하며 깨달은 바를 써내려간 책.

도시 아이들과는 다른 여름방학이었겠죠?
방학이면 아이들이 갈 데도, 할 일도 없어요.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너무 심심한 방학을 보냈는데 그다음 학기부터 손들어서 자기가 필요한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더라고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해요. 얼마 전에는 둘째가 친구들끼리 여행 가기로 결정했다고 통보하더군요. 물론 허락하지 않았죠. 첫째는 교사, 둘째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말하는데 그만큼 공부를 하진 않아요. 근데 안 될 거라고도 생각 안 해요. 직장 생활하다가 로스쿨에 입학해 변호사가 되거나, 마흔에 한의사가 된 사람도 있잖아요. 인생은 길고 직업은 필요에 따라서 바꿀 수 있어요. 제가 그랬듯 말이에요.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또 무언가가 되지 않는다고 인생이 어떻게 되지도 않아요. 주위를 둘러보면 속도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에요. 인생은 길어요. 입시, 학교 시스템에 놓여 있을 때 그걸 잠깐 까먹는 게 되는 것뿐이에요.

육아를 통해 초연해진 건가요?
아이의 생명을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바뀐 것 같아요. 또 제겐 첫째뿐만 아니라 둘째도, 남편도 있잖아요. 태어나면 제일 먼저 담당해야 하는 건 ‘자신’이에요. 그나마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이고. 사실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건 본능적으로 저도 모르게 아이를 너무 걱정해서 그래요. 아이가 한번은 폐 문제로 급작스럽게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아이가 1분에 숨을 몇 번 쉬는지 저도 모르게 세고 있더라고요. 그걸 막을 수가 없어요. 그것만이겠어요? 아이 키, 시력, 기력 별의별 걱정을 다해요. 저는 아이의 케어 기버(Care Giver)가 되었으니까요. 근데 아이는 그걸 버거워하죠. 엄마가 종일 자기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잖아요. 2014년에 저희가 집을 다시 지었는데 30평, 10평 두 채로 나눠서 첫째 아이 집을 따로 지었어요. 짓기 전에 아이들한테 따로 살아보고 싶냐고 먼저 물어봤어요. 아이에게서 제 눈을 거둬야 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둘째 아이는 저희 부부랑 살겠다고 결정했고요. 밥 먹을 때만 인터폰으로 불러요. 학교 가라고 깨우지도 않고요.

아이들은 어떤 존재인가요?
처음에는 내 인생에 많은 걸 가르치러 온 선생님인 줄 알았어요. 지금은 선물? 생활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데 계속 자라요. 자라나는 생명이 옆에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잖아요. 심어놓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모습만 봐도 좋은데 말이에요. 게다가 나한테 사랑도 줘요. 평생 나한테 이렇게까지 사랑을 주는 사람을 만나본 적 없어요. 아이들이 고등학생, 성인이 되면 집을 떠나요. 그러고 나면 다른 관계가 열리겠죠. 부모, 자식이라기보다는 인간 대 인간, 존대 대 존대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기기사

MEET 더보기

@styler_mag

Instagram has returned invalid d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