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록의 그럴싸한 세계

그의 주위로 다른 시공간이 생겨난 듯 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마치 남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중저음의 목소리, 남들과는 다른 박자감의 말투로 어떤 캐릭터든지 ‘오광록스럽게’ 소화하는 사람. 연기파 배우로 대중에게 각인된 오광록이 최근 아들과 함께 KBS2 가족 관찰 예능 <엄마 아빠는 외계인>에 출연해 꾸밈없이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이혼 후 20년간 떨어져 지낸 아들에 대한 아릿한 마음부터 식물과 커피, 시를 사랑하는 소년의 얼굴, 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까지 그의 세계는 넓고 깊다.

연기파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요.
예능은 의외였죠. 작업이 뜸하던 중에 <엄마 아빠는 외계인>에서 섭외가 왔어요. 서로 떨어져서 지냈으니까 거리를 두고 서로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족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너무 밀착해서 보면 못 보는 것도 있고.

1년간 아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요.
1년 사이 아이가 좀 더 사내가 된 듯한 느낌이랄까? 이제 스물일곱이니 청년이기도 하고. 떨어져 있었어도 닮은 게 많아요. 아들은 싱어송라이터인데 가사를 시적으로 써요. 커피 좋아하는 것도 닮고, 재활용품 분리 수거하는 것도 지구에 나무 한 그루 심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귀찮아도 꼼꼼히 하고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서로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어젠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에서 아들을 만났어요. <엄마 아빠는 외계인>에 같이 출연했던 알렉스, 양재웅 의사와 왔더라고요.

<두니아>, <청년농부>를 보면 에디킴, 박재정 같은 어린 연예인들과 참 잘 어울려요.
피터 팬 같달까? 내게 그런 판타지가 생겼다니 정말 기쁘네요. <청년농부>에 출연한 건 텃밭 농사를 18년 정도 지었기 때문이에요. 식물을 참 좋아해요.

 

텃밭에선 무엇이 자라나요?
기본적으론 쌈채소들, 많을 땐 20여 종류가 자라죠. 보통 10종류는 길러요. 직접 기른 쌈채소는 맛이 엄청 좋죠. 사 먹는 채소는 흙에서 나온 지 조금 된 거니까요. 마치 배에서 갓 잡은 물고기를 먹을 때의 퍼덕거리는 싱싱함? 깨물면 아삭하죠. 오이, 호박, 가지, 고추도 많이 심는데 비료는 안 쓰고 거름만으로 키워요.

연기하랴, 예능하랴, 농사는 언제 짓나요.
처음엔 나이 드신 내외분이 옆 텃밭을 가꾸셨어요. 내게 농사를 알려주셔서 ‘농선생님’이라 불렀는데 지방으로 내려가셨는지 보이지 않네요. 다 떠나고 나만 남으니까 밭이 넓어져버렸어요. 쌈채소들은 무성해지기 시작하면 나눠 주는 게 일이 되거든. 쑥쑥 커버려서. 부지런히 안 나눠주면 꽃이 피어버려요. 혼자서는 힘에 부치니까 근처에 사는 후배 배우 홍성춘이랑 같이 삽질도 하고 잡초도 뽑아요.

올해 농사는 어때요?
엉망이에요. 올해, 작년, 재작년 너무 뜨거웠으니까요. 집에서 텃밭까지 거리가 꽤 돼서 아주 이른 아침, 새벽에 나가야 하죠. 게다가 5월 중순이 지나면 모기가 너무 많아요. 예전에는 밭농사가 아주 즐겁고 궁금해서 모기한테 20~30방 물리는 건 개의치 않고 종일 밭에 있었는데. 샤워하면 싹 가라앉았거든요. 여름이 너무 뜨거웠던 3년 동안은 땡볕에 나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바빠지면 못 가기도 하고. 그래도 작년엔 그럭저럭 잘했는데 가을에 누가 고추를 다 따가 버렸어요. 고추 한 판에 30그루인데, 한 그루에 20~30개만 열렸다고 쳐도 600~1000개라는 어마어마한 양이죠. 너무 속상해서 밭에 아예 안 갔어요.

나이 먹을수록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참 좋아하는 게 여행인데, 언제든 여행 떠날 채비가 되어 있으면
참 설레는 삶이잖아요? 연기도 똑같아요.

식물을 자식처럼 생각했나 봐요.
누구나 그렇지 뭐. 씨앗을 뿌리기도 하고 모종을 심기도 했으니. 흙을 자주 뒤집을수록 병충해가 덜 생기니까 삽질도 많이 했고요. 근데 삽질 한 번 안 한 사람이 와서 다 가져갔으니, 원. 몇 개 없어진 거야 ‘누가 잘 먹었겠다’ 싶지만 그렇게 깡그리 가져가 버렸으니 엄청 속상하고 화도 났죠.

방송에서 식물과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너무 미안했어요. 잡초랑 같이 크는 것도 좋은 농사법이라곤 하지만 촬영 때문에 바빠서 오랜만에 갔으니까. 무성하게 잡초가 뒤덮어버렸고, 애들(채소)은 너무 호리호리 한 거예요. 잡초는 그 땅에서 겨울을 지내고 정착한 아이들이고 내가 뿌린 씨앗에서 난 채소는 새로 정착해야 하는 아이들이라 어느 정도 손길을 주면서 보살펴야 하는데, 너무 창백한 아이를 만난 듯이 미안했죠. 집에서도 작업실에서도 화초를 많이 키우는데, 손을 안 탄 애들하고 사랑을 받은 애들은 피우는 꽃부터 달라요. 꽃의 개수도 다르고.

기르는 재미에 푹 빠지셨네요.
보통 3월 말에서 4월 초순에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어요. 농사 첫해에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뚜껑을 열듯 탁 흙을 밀어내 발화한 새싹을 처음 봤어요. 흙을 갈라내고 가는 실처럼 올라와 이렇게 만세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경이롭더라고요. 그해에 가뭄이 와서 약수터에 앉아 친구랑 농사 이야기를 하는데, 씨앗에서부터 추수하기까지의 시간이 느껴지더라고요. 이 풀에서 저 풀까지의 거리에 움트지 않는, 갈라지지 않는 풍년이 어디 있겠느냐 싶었어요. 장마도 오고 가뭄도 오고. 그런 걸 다 겪고 견뎌내면서 풀들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그 시간이 피부로 쩍쩍 와 닿는 거지. 지방 촬영 중일 때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하면 밭에 있는 씨앗들, 새싹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요. 가물다가 오랜만에 비가 오면 또 키가 부쩍 크거든요.

식물 하나하나에 이렇게 마음이 일렁이는데, 일곱 살 난 아들과 헤어질 때 쉽지 않았겠어요.
누구나 사춘기 때부터 명치끝에 아린 응어리들이 생기잖아요. 그런 게 우수가 되고. 아이랑 헤어지고 산 시간에는 슬픔이 깊게 젖어 있죠. 열여덟 살 때부터 습작을 했을 만큼 나는 시를 좋아해요. 그런데 내 시 속에서 별도 버리고 싶은 거야. 별도 글썽거림 같고 슬픔 같아서. 누군들 안 그렇겠어요? 본능적인 거지.

어떤 아버지인가요?
아들이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하면 보고, 내가 문자를 남겨도 답장이 안 오면 지금은 보고 싶지 않은가 보다 하죠 뭐. 누구나 그렇듯 사춘기의 질풍노도가 있었을 테고, 아버지가 필요할 때 아버지가 없었던 아픔이나 원망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내가 모든 해답을 줄 순 없으니까. 인생이 다 그렇죠. 테두리를 지키는 것, 또 반대로 깨트리는 것이 원한다고
다 되지는 않으니까. 큰 폭풍이 찾아올 때도 있고.

요새도 시 쓰나요?
그쵸.

무슨 내용을 주로 쓰나요?
삶에 대한 이야기. 시는 영혼과의 대화이자 삶을 되비추는 거울 같은 거예요. 삶에서 겪는 일들이 쌓여 자연스럽게 내게 묻어나는 것을 바라봐요. 그리고 그 순간들을 적어요.

일하지 않는 날 오광록의 하루는요?
어떻게 커피를 맛있게 내릴까 고민하고 집중하고. 또 산책도 가고, 누군가의 좋은 시를 발견할 때도 있고. 온갖 들풀이 뒤섞여 마당이 정글이긴 하지만, 그래도 화초가 있어서 이틀에 한 번씩 물을 줘야 해요. 화초는 땅이 아니라 화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갈증의 유통기한이 있거든요. 텃밭에도 나가고. 아, 신기하게도 서울에 여치도 있고 메뚜기도 있어요. 텃밭에 들풀이 있으니까 찾아오나 봐요. 또 원래 아욱, 쑥갓 씨도 뿌리는데 올해는 안 뿌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갑자기 땅에서 아욱이 올라오는 거예요. 작년에 피지 못했던 아이들이 올해 피어난 거지. 풀들은 놀라워. 기다렸다가 자기 환경조건이 되면 피어나요. 하루가 빨리 가죠. 일찍 일어나서 길게 보내야 하는데. 하하. 저녁이면 못 봤던 영화도 보고 술을 한잔하기도 하고. 그럼 또 음악이 듣고 싶어지고. 거기에 비까지 내리면 비 구경하다가 동이 트고.

소문난 커피 애호가예요.
스물셋, 넷에는 모카포트로 우려낸 에스프레소를 무식하게 머그 두 잔씩 마셨던 것 같아요. 거기에 담배 석 대 딱 피우면 그렇게 좋았어요. 술도 참 좋아하는데 주막에 모여서 떼로 술 마신 지 7년은 된 것 같아. 술을 조금 멀리하면서부터 커피를 더 파게 되었어요. 한두 잔 마시고 깔짝거리기 싫어서 커피로 건배를 하니까 술을 권하는 사람이 없어서 좋더라고요.

술은 끊었나요?
사람들 떼로 있는 곳에서는 안 마셔요. 드라마 쫑파티를 할 때도 조금 마시고 금방 퇴장해요. 예전엔 한 번 시작하면 2박 3일 마셨는데. 하하. 습관의 독이 무서워요. 습관으로부터 조금만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어요. 30년이나 작은 독에 술을 담은 셈이니 이제 깨끗하게 헹궈서 해와 바람에 말려야 할 텐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뷰티풀 데이즈>에도 참여했어요. 배우 이나영의 복귀작이라 화제를 모았죠.
이나영 씨가 돈에 팔려와 조선족 남편과 결혼하는 탈북 여성을 연기해요. 저는 남편 역할이고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때 함께한 시간도 있고, 그녀가 결혼 후 오랜만에 하는 영화라기에 기뻤죠. 윤재호 감독과 안 지는 좀 오래되었어요. 8~9년 전에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윤재호 감독의 <약속>이 폐막작 대상에 선정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파리에 온 지 9년 된 조선족 여인이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다큐멘터리였는데 정말 좋더라고. 은빛 같은 영화였어요. 그땐 술을 좀 마실 때라, 첫만남에 윤 감독이 필름이 끊겼죠. 하하. 프랑스에서 오래 공부한 친구인데 남과는 다른 그만의 감수성이 있어요. 3년 전에 칸 영화제에 출품한 <히치하이커>란 영화가 있는데, 그 작품을 찍을 당시에 제가 현대무용, 뮤지컬 공연이 있어서 못 도와줬거든요. 몇 해 동안 윤 감독과 같이 <뷰티풀 데이즈>를 준비했어요. 이나영 배우는 유러피언 같은 느낌, 또 묘한 자기 세계관이 있는 배우라서 윤재호 감독의 파리지앵 세계관과 만나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최근엔 드라마 <마성의 기쁨>에도 출연했죠.영화, 드라마, 연극까지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연기하시네요.
할 수 있는 역할이 주어진다는 건 대단히 행복한 일이에요. 시나리오가 계속 쌓여서 선택해야 할 때도 있지만 우체통에 편지 한 장 안 올 때도 있는 거죠. 대본을 정독하고, 감독이든 연출이든 서로 만나서 시나리오를 상의하고 맞춰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하는 거죠. 좋아한다는 건 이상향적인 거니까요. 순수 사회에 대한 이상적 코드를 지닌 작품을 좋아하죠. 뭐랄까. 가슴에 남는 영화,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늘 기다리죠.

이야기를 나눌수록 영원히 늙지 않는 청년의 얼굴이 보이네요.
여전히 도전하고 싶은 역할이나 연기가 있다면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이 먹을수록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참 좋아하는 게 여행인데, 언제든 여행 떠날 채비가 되어 있으면 참 설레는 삶이잖아요? 연기도 똑같아요. 어떤 역할이든 떠날 채비가 되어 있는 게 이제는 내 꿈인 것 같아요. 아이참, 그럴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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