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RO SCENE #을지로

을지로는 레트로 서울의 성지다. 아티스트의 작업실과 카페, 노포 식당을 찾아가기 위해 미로 게임을 하듯 휴대폰 속 지도를 보며 골목을 걷는다.

‘몇 바퀴만 돌면 탱크도 로봇도 만들 수 있지’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았던 세운상가. 전기, 전자, 기계금속 같은 국내 제조업을 이끌던 이곳에 젊은 기운이 스며든다. 오래된 가게 사이 카페와 분식집, 서점들이 들어선다. 세대가 교차하며 서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

을지로입구역 1-1번 출구. 봄여름이면 어르신들과 인근 회사원들의 쉼터가 되어주던 자리에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책을 큐레이팅하는 서점 아크앤북이 문을 열었다. 유럽의 오래된 도서관이 떠오르는 이 서점에선 노신사와 젊은 직장인이 같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한때 서울에서 비싼 주상복합에 속했던 세운상가 상층부. 아직도 이곳엔 3대째 터를 잡고 사는 가족부터 백남준 선생 작품 전담 엔지니어, 작업실을 마련한 젊은 예술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차가운 철재 꾸러미와 귓가를 울리는 용접 소리, 쉴 새 없이 일하는 아저씨들로 가득한 철공소 골목에도 낭만이 남아 있다. 어항 속 빨간 물고기를 기르고 솔방울을 모은다. 을지로의 삶은 뜨겁다.

세운상가 일대 인쇄소, 철공소 골목에도 재개발 뉴스가 들린다. 누군가에게는 길었던 삶의 무대가 저무는 일.

당대의 건축가 김수근이 1968년 지은 대림상가. 우리나라 전자 오락기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유통되었다. 경기가 예전 같지 않지만 젊은 예술가, 가게 주인들이 크고 작은 이벤트를 열어 활기를 불어넣는다.

을지로 #1 커피

몇십 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다방과 인스타그램 피드를 가득 메우는 힙한 카페가 공존한다.

20~30대 친구들에겐 다방 자체가 생소한 공간이에요. 너무 생소해서 새로워 보일 정도죠. 주인장들은 젊은 사람들이 다방을 찾아와서 공간과 메뉴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감동해요.
그 둘을 연결하는 거예요.

일일찻집
오래된 다방에서 색색의 앞치마를 두른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가 손님을 맞는다. 메뉴는 다방커피, 쌍화탕이 기본.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차를 내어주고자 열탕기에 잔을 데운다. 폭신한 의자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다방에선 처음 만난 옆 사람과도 금세 친구가 된다. 그런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나이 지긋한 다방 주인이 미소를 머금는다.
카페에 밀려 이제는 찾아보기도 어려운 다방을 을지로에서는 아직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선뜻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떤 메뉴를 시켜야 할지, 어른들의 공간에 이방인이 되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염려가 앞서기 때문. 가구 디자이너 소동호와 그래픽 디자이너 유혜인, 안상희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배정현은 젊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다방에서 일일찻집을 연다.


“소동호 작가의 작업실 산림조형을 방문했다가 근처 세운상가의 솔다방에서 커피를 마셨어요. 공간이 주는 분위기가 굉장히 좋아 많은 사람이 경험하길 바랐죠.” 농담처럼 ‘일일찻집을 해볼까?’라는 대화를 주고받던 그들은 지난여름부터 프로젝트를 기획해 11월에 처음 찻집을 열었다. 연이어 12월엔 세운나다방에서 찻집을 열었다. 그들이 놀이처럼 시작한 일일찻집 프로젝트는 다방 안이 손님으로 가득 찰 만큼 성공적.
“솔다방 프로젝트 때 할어버지와 엄마, 손녀딸 3대가 온 손님이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당시 다방에 얽힌 추억 이야기를 대학생 손녀딸이 듣고 좋아하는 모습에 저희도 감동했죠.” 티켓 가격이 1만5000원, 2만원으로 저렴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음료와 함께 접시 한가득 나오는 주전부리, 찻잔 선물 등으로 구성이 알차다. “다방에서 차만 팔면 요즘 사람, 그러니까 인스타그래머들에겐 매력 없어요. 사진을 찍어 공유할 특별한 아이템이 필요했죠. 옛날 다방에서 사용하던 찻잔과 접시를 찾아 로고 인쇄도 해야 하죠. 또 찻값을 사장님께 그대로 전달하기 때문에 저희는 적자예요. 하하.” 그럼에도 네 사람은 한 달에 한 번 오래된 다방에서 일일찻집을 이어갈 계획이다. 그리고 각자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크리에이터들답게 그간의 기록으로 전시나 책 등의 콘텐츠를 엮어볼 생각이라고 하니, 이 재미난 일은 끝나지 않을 예정이다.

저희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공간을 바라요. 단순해요.
들어왔을 때 ‘와! 예쁘다’,
음식을 먹었을 때
‘아 맛있다!’는 말이 나오도록.

죠지서울
인쇄소 골목을 두 바퀴는 돌았다. 그럼에도 인스타그램 피드를 줄 세운 핫한 카페 죠지 서울을 찾지 못했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골목에 서 있는데 인쇄소 사장님이 옆 건물을 가리키며 3층으로 올라가란다. 그 건물 302호. 번듯한 간판 하나 세우지 않았지만 카페 안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일본인 관광객까지 카페 내부와 메뉴를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케이크와 귀여운 하트 수제 곤약젤리가 올라간 소다음료가 인기 메뉴. 음식과 패션 분야에 종사하던 두 대표가 운영하는 죠지 서울이 이렇게 찾기 어려웠던 이유가 있다.
“작업실 겸 카페, 바, 빈티지 숍 등으로 사용하려고 마련한 공간이에요. 핑크팡팡 케이크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카페를 찾는 분이 많아졌고 그제서야 공간의 정체성이 카페로 정해졌어요.” 우연히 문을 연 카페치고는 음료와 베이커리에 대한 두 사람의 철학이 확고하다.

두 대표가 빈티지 물건 하나하나를 모아 꾸민 죠지 서울.

“재료비가 많이 들더라도 좋은 재료만 써요. 풍미가 좋은 동물성 크림을 사용하는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모양이 무너지죠. 그때그때 만드느라 많이 기다려야 해서 죄송하지만 대신 맛은 더 좋아요.” 커피도 바리스타들의 장난감이라는 애칭이 붙을 만큼 추출하는 방법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에어로프레스를 사용한다.
“한 잔 내리는 데 적어도 5분은 걸려요.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오셔서 빨리 달라고 할 때 난처하죠.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일까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손님들이 기계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도, 저희 카페만의 커피 맛을 지키는 것도 좋아서 아직은 유지하고 싶어요.” 을지로를 선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도 시원시원하다.
“을지로라는 지역이 주는 느낌 자체가 좋았어요. 또 카페, 식당을 찾아 골목골목을 다니는 것도 재밌었죠.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럴싸한 대답을 꾸며내기보다 좋아하는 것을 그저 좋아할 뿐이다. 카페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웠다. 인테리어도 손수 했다. “영화를 볼 때 색감이나 영상미 같은 걸 유심히 보는 편이에요. 빈티지 물건으로 채우다 보니 공간을 꾸미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요. 인테리어는 계속 바꾸는 중이죠. 지금 바꾼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어요. 손님이 다시 왔을 때 똑같은 모습이면 지루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메뉴도 계속 개발하고 있고요.”

40년간 을지로 인쇄소 골목을 지킨 금박인쇄 장인 김용춘 씨와 그에게 주말마다 ‘다시 세운 인쇄기술 학교’ 수업을 듣는 독립출판인 이창석 씨.

을지로 #2 종이

인쇄소 골목에선 오래 묵은 진한 잉크 냄새가 배어난다. 동시에 크고 작은 큐레이션 서점이 이웃해 있다.

산업이 한창일 땐 안 찍어본 게 없어요.
전국에 뿌려진 거의 모든 인쇄물이 여기를 거쳐갔으니까. 이젠 욕심 없어요.
그저 이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서 사라지는 게 아쉬울 뿐이죠.

현대금박
기술을 배우려 시골에서 올라와 을지로 인쇄 골목에서 먹고 자며 기계 닦기만 1년. 밤에 몰래 기계를 만져가며 기술을 배우던 소년은 40년이 흐른 지금 금박인쇄 장인이자 레터프레스 기계를 해체, 수리하는 전문가로 성장했다. “금박 개념이 없던 시절부터 고급 인쇄로 금박을 선호하던 때를 지나 사양길까지 겪었죠. 저는 레터프레스 방식 기계를 개조해서 금박을 찍어요. 유행은 돌고 도니까 지금은 레터프레스가 다시 인기죠.” 사실 레터프레스 기계는 생산이 중단된 지 오래. 공장은 만일을 대비해 모아둔 부품들로 가득했다.
젊고 곱던 아내와 같이 밤새워 물량을 맞추던 시절도 있었다. “자동차 3사의 브로셔를 다 찍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까진 청와대 연하장도 제가 다 작업했죠. 매년 8월부터 12월까지는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 만드느라 집에 갈 시간도 없었어요. 지금은 카드보다는 메일, 카톡 주고받는 시대잖아요. 올해는 카드를 2장? 찍은 것 같아요.”
최근엔 인쇄물 문화 자체가 변해 청첩장, 독립출판물을 많이 찍는다. 주로 젊은 예술가, 대학생들이 그를 찾는다.


“큰 기계들과 다르게 레터프레스로는 소량도 찍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 집 아들들이 학생일 때를 생각하면 용돈도 부족할 때니까 이윤도 못 남기지. 내가 이걸 얼마나 더 하겠어요. 욕심을 부리면 얼마나 더 부리고. 근데 그 친구들은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무엇이 될지 어떻게 알아요. 나는 새로운 디자인을 접하고 그 친구들은 작업의 디테일을 배우지. 서로 도움이 되는 거예요.”
산업의 황금기를 겪다 보니 세월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버렸다. 고생만 한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보이던 그는 이제 은퇴를 생각한다. 시간이 날 때면 골목골목 후배들이 하는 가게를 돌곤 한다. 그렇게 서로 어려운 일을 살펴준다. 최근엔 서울시와 협약을 맺고 ‘다시 세운 인쇄기술 학교’를 시작했다. 디자이너, 책 편집자 등 다양한 직군, 연령대의 열 사람이 주말마다 그의 작업실에 모여 기술을 전수받는다. 이후에는 을지로에 설립 계획 중인 ‘서울시 인쇄학교’에 기계도 기증할 계획이다. 을지로에 그의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았다.
“열여덟에 이 골목에 들어와 인생 절반을 여기에 바쳤지. 삶의 터전이기도 하고요. 저한테는 여기가 최고죠. 뭐, 없는 살림에 이만큼 일궜으니 아쉬울 게 없지.”

서점다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 세운상가. 전자제품 상가로 호황을 누리며 1970~80년대에는 없는 게 없는, 소위 ‘해적판 레코드’ 같은 복제품까지 살 수 있던 곳이었다. 세운상가에선 인공위성도,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서울시에서 ‘다시 세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오래된 가게와 차가운 성질의 물건만 즐비하던 세운상가에도 최근 몇 년 사이 젊고 따뜻한 기운이 스몄다. 카페와 아티스트의 작업실, 갤러리 등이 들어온 것. 지난봄엔 작지만 정말 ‘괜찮은’ 책만 모아 소개하는 큐레이션 서점이 상가 3층에 들어섰다. 전자상가에 책방이 들어선 것부터가 이색적인데 오래된 가게들 사이에서도 서점 다다는 이질감 없이 부드럽게 조화를 이룬다. 세운상가에서 걸어서 20분이면 닿는 종로 일대 대형 서점에 없는 책이 없다지만 이곳에 들러야 하는 이유는 서점장의 책에 대한 곧은 애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독립출판을 했어요. 사무실을 알아보던 중 다다서점 자리를 만났죠. 한눈에 반했어요.

세운상가라는 이름에는 ‘세상의 모든 기운이 모인다’는 뜻이 담겼대요. 이 건물 자체가 서울의 역사와 일맥상통해요. 원래도 조그맣게 서점을 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는데 이를 실현해준 공간이죠.” 세운상가의 이름처럼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이혜진 서점장의 일을 응원한다. “가게를 지나는 어른들이 ‘너 뭐해 먹고 살래?’라며 걱정해주시죠.” 어른들의 걱정과 달리 그녀는 야무지게 책방을 운영한다. “책을 많이 진열해놓지 않았어요. 물건도 책도 넘쳐나는데 진정으로 나를 성장시켜줄 만한 것은 많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웠어요. 홀로 주제를 정해놓고 수소문해 괜찮은 책을 모았어요. 이제는 그걸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거예요.” 이번엔 ‘유토피아’를 주제로 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 추천해줄 입문 책도 준비했다. 종종 서점을 찾은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럴 땐 이 책을 보면 좋아요!’ 하고 책을 처방해주기도 한다.
“제가 추천하는 책들이 요새 유행하는 에세이, 여행서는 아니에요. 그런 힐링서는 너무 많잖아요. 고난도의 인생 속에 녹아드는 책들을 추천해요. 어쨌든 삶은 고난이니까요.”

근처 식당만 해도 기본 30년이에요. 아파트에서 자란 저희 세대는 골목의 정취를 모르죠. 이곳의 매력은 사람이에요.

을지로 #3 시간

한자리에서 같은 메뉴를 팔며 자신만의 시간을 쌓는 가게도, 그렇게 쌓여온 시간들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예술가도 있다.

을지OB베어
서울에서 맥주 핫 플레이스를 꼽으라면 단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다. 가게 20여 개가 늘어선 골목에서도 노맥(노가리와 맥주) 메뉴를 처음 개발한 을지OB베어는 38년째 같은 자리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노가리 1000원, 500cc 맥주 3500원. 저렴한 가격에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 커플도, 인근 상가 주민들도 부담 없이 가게를 찾는다. 마른 노가리와 매콤한 고추장, 시원한 생맥주의 조합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1980년 OB베어에서 간단히 서서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체인점을 모집했고, 그해 겨울 을지OB베어도 문을 열었다. 당시 맥주 한 잔에 380원, 마른 안주는 본사에서 100원에 일괄 제공했다. 하지만 주류 공급자의 안주 공급이 불법이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판결로 인해 새 메뉴가 필요했던 것. 체인점마다 닭튀김, 대구포 등 여러 메뉴를 개발했다. 을지OB베어의 1대 사장 강효근 씨는 인근 인쇄소, 철공소 골목 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메뉴로 노가리를 골랐다. 강원도에서 건조, 가공한 노가리를 연탄에 잘 구워 내어준다. 또 맥주는 급속 냉각기 대신 디스펜서와 연결된 냉장고에 케그(맥주통)를 통째로 넣어 숙성해 시원하면서도 목넘김이 좋도록 했다. 가게는 늘 일을 마치고 ‘한잔’하러 온 인쇄소, 철공소 노동자로 붐볐다. 가게에 대한 애착이 넘쳤던 강효근 사장은 여든일곱까지 맥주를 뽑았고 2년 전까지 가게로 출근했다. 지금은 딸 강호신 씨와 사위가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을지OB베어가 특별한 진짜 이유는 노가리와 맥주 때문도, 기념비처럼 벽면을 채운 레트로 OB 맥주잔들 때문도 아니다. 이 공간에 을지로 사람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낮 12시에 문을 열지만 2013년까진 여느 호프와는 다르게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했다. 밤샘 작업 후 맥주 한잔 마시러 오는 인쇄, 철공소 골목 노동자 손님들을 위해서였다. 지금도 그 시절을 잊지 못해 이른 아침 가게를 찾는 어르신들이 있다. 그럼 오픈 준비가 덜 되었어도 가게 안으로 반갑게 맞이한다. 밤 10시에 문을 닫았던 이유도 애틋하다. “가게 문을 일찍 닫아야 손님들이 그때라도 들어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것 아니냐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가게 밖을 나서며 생각했다. 을지로의 오래된 가게들에서 강한 울림이 느껴지는 건 이렇게 서로 긴밀하게 얽히고 엮인 시간과 마음의 덕이 아닐까라고.

아버지는 을지로 공장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오셨어요.
이 가게는 그냥 가게가 아니라 그분들의 인생이죠.

R3028
높은 빌딩들의 그늘 사이에 목공소와 철공소 골목이 있다면, 그 골목엔 작지만 힘차게 움트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도 있다. 2016년에 중구청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을지로 산림동에 작업실을 얻은 아티스트 그룹 R3028은 지역을 기반으로 창작, 전시, 공연, 교육 등의 예술 작업을 진행한다. 고대웅, 이원경, 류지영 세 명의 작가로 이뤄진 그룹은 철공소 골목에서 소음과 어우러질 수 있는 음악 공연도 하고, 철공소 사장님들과 함께 공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설치물도 만들며 가까워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셔터 아트 프로젝트.
“서울시 아동청소년심리상담센터에서 보호받는 폭력, 결손가정 아이들과 선생님이 팀을 이뤄서 셔터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어요. 아이들의 성취감, 협동심을 위해 인근 공장 사장님들께 셔터를 캔버스처럼 기증받았죠. 셔터가 차갑잖아요. 자신을 남에게서 방어하기 위해서 만든 물건이고요. 아침저녁마다 열고 닫으면서 마주하는 곳에 손주뻘 되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려놓은 거죠. 저희 작업실 맞은편 태양공업사 사장님은 다음 날 우셨어요. 그라피티처럼 젊은 친구들이 그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예쁜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면 과자라도 사놓았을 텐데 하시면서요.” 고전문학 작품 속에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관광 명소가 되는 유럽과 달리 쉽게 짓고 허무는 서울의 현실에 아쉬움이 앞선다.

R3028 작업실 한편, 고대웅 디자이너의 공간.

“종로 맞은편 시계 수리 골목이 재개발 대상으로 선정되었어요. 외국 브랜드에서까지 작업을 맡기러 찾아오는 곳인데 다 쫓겨났죠. 을지로는 되게 많은 레이어가 있는, 시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요. 낡고 허름해 보이는 건물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어요. 단번에 지어진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증축되었거든요. 한 건물에 초가, 기와 등 다양한 시대의 건축법이 숨어 있어요.”
세 사람은 지역의 역사를 속속들이 찾아보고 오래된 지도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며 을지로의 이야기들을 아카이빙하고 있다. 을지로 일대를 걸으며 진행한 인터뷰 내내 골목골목 을지로의 숨겨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아까 걸었던 골목길은 조선시대의 대로(大路)였어요. 그 길을 따라 아픈 사람들이 혜민서로 향했죠. 지금 커피 한약방 자리가 백성들을 치료하던 관청이었죠.” R3028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예술과 기술의 컬래버레이션, 저희가 디자인한 걸 장인들과 작품으로 만드는 일, 교육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요. 동시에 저희가 쌓은 인프라를 예술가들이 활용할 수 있게 형식을 만드는 중이에요.”

을지로의 매력은 시간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에요.
한옥마을 같은 것들이 문화재로 선정되어 보호받는다면
이곳에서 그걸 아직도 사용하고 있죠.

인기기사

GO 더보기

@styler_mag

Instagram has returned invalid d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