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 감독과 엄마의 경계

배우 활동을 멈춘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엄마가 되었고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 추상미는 배우와 감독, 감독과 엄마의 경계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중이다.

커다란 눈동자, 오랜 세월 연극 무대 위에서 다진 또렷한 발음과 명쾌한 목소리로 지적이고 다부진 인상을 주던 배우, 추상미. 대표작은 영화 <생활의 발견>과 드라마 <사랑과 야망>, 마지막 작품이 2009년 드라마 <시티홀>이었으니 그녀를 10년간 만나보기 어려웠던 셈이다. 그사이 천생 배우라는 수식이 어울리던 추상미는 아홉 살 아들의 엄마가 됐고, 감독으로서의 필모그래피도 추가됐다.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전쟁 고아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개봉하게 된 것. 전쟁 당시 한반도 곳곳에 생겨난 고아 1500명이 김일성의 지시로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졌고, 아이들이 귀환 명령을 받기 전까지 폴란드 지도교사들이 8년간 인종과 이념을 넘어 사랑으로 품는 스토리다. 67년이 지난 지금도 폴란드 선생님들은 자신을 ‘마마’, ‘파파’로 부르던 아이들을 기억한다. 역사에 의해 필연적으로 고통받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결국 상처와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 모성으로 재해석됐다. 같은 주제의 극영화 <그루터기> 제작을 앞두고 있는 추상미의 행보에서는 모종의 사명감마저 느껴진다. 배우와 감독, 감독과 엄마라는 경계에서 스스로 모든 역할을 즐기듯 해내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촬영 전 창밖 풍경을 보며 이곳에서 영화 촬영을 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간의 일상은 어땠나요?
10년 정도 배우가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살았어요. 의미 있고 큰 사건이 많았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학부모까지 됐어요. 아들 지명이가 지난해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곧 2학년이 돼요. 어제가 지명이 생일이었는데, 이전부터 앵무새를 사달라고 엄청 졸랐어요. 앵무새를 사서 집에 오니 앵무새가 긴장했는지 밥도 먹지 않고 아이를 물더라고요. 남자아이들은 뭐든 살살 다루지 않잖아요. ‘먹어! 빨리!’ 하면서 새에게 먹이를 들이밀다 물린 거죠. 결국 아이는 ‘으애앵’ 울고. 자기가 사달라고 해놓고. 하하. 이처럼 소동의 연속인 하루하루가 재밌어요. 그리고 오래되고 낡은 꿈이었던 연출 공부를 시작해 감독이 됐죠.

아들에게 추상미는 어떤 엄마인가요?
사랑을 많이 주는 엄마? 지명이는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게 가장 행복하대요. 스킨십도 자주 하고, 예쁘고 귀여운 물건을 굉장히 좋아하고요. 제가 가끔 ‘씩씩하고, 쿨하고, 시크한 건 어때?’라고 말하기도 하죠. 기질 자체가 사랑이 많이 필요한 아이,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는 게 최고의 가치라 여기는 아이예요. 저와 그런 점이 닮았나 봐요. 제가 지금은 그 사랑을 일로 좀 더 옮겼지만. 하하.

아이가 감정이 풍부한 건 엄마, 아빠가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이겠죠.
맞아요. 여덟 살 꼬마가 벌써 시를 자주 쓸 만큼 감정이 풍부하죠. 뮤지컬 배우인 남편도 겉으로는 상남자인 척하고, 그래서 팬덤도 많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살랑살랑’한 면모도 있어요.

감성적인 두 남자와의 생활은 어떤가요?
서로 늘 사랑한다고 말해요. 아들은 그냥 ‘엄마 사랑해’가 아니라 ‘엄마가 너무 좋아서 엄마한테 시선을 뗄 수 없어’라고 표현하죠. 그러면 굉장히 좋으면서도 ‘너 그 얘기 엄마한테만 해라. 여자친구한테 하지 마!’ 라고 바로 한소리를 하죠. 고학년이 되어 이런 표현을 안 한다면 섭섭할 거 같아요.

아버지 고 추송웅 씨 때문인지 뼛속까지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해요. 그래서 감독이라는 수식이 낯설기도 하고요.
사실 아버지는 배우로 유명하셨지만 연극 연출도, 각색도 하셨죠. 게다가 음악도 작곡하고, 무대장치까지 직접 만들며 다방면으로 예술가적 면모를 보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연출과 연기의 경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엄청난 몰입을 요구한다는 점과 온 마음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점은 같죠.

그래도 배우를 선택한 건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겠죠.
고등학생 때 작가가 되고 싶어서 대학은 불문학과로 진학했어요. 하지만 입학 후 곧장 홍익대 연극반에 들어갔죠. 어릴 적부터 아버지 무대를 동경해서인지 아버지 연극처럼 어렵고 철학적인 주제의 작품을 많이 했어요. 데뷔하고 난 뒤에는 사실 신인이 처음부터 잘할 수 없고 실수를 할 수 있는데도, 그게 용납이 안 되는 상황이 많았어요. 큰 부담으로 느껴졌죠. 영화와 드라마는 무대와 많이 달라서 회의감이 들기도 했고요.

어떤 종류의 회의감이었나요?
어느 순간 영화, 드라마에서 부잣집 딸, 주인공 남자를 뺏는 역할이 들어왔어요. 비슷한 캐릭터를 반복하다 보니 나 자신이 소모적인 상품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배우라는 직업이 정체성을 담기에 꼭 맞는 옷인가 싶었죠.

그래서 대학원에 입학했나요? 정식으로 연출 과정을 배우지 않은 감독도 많잖아요.
서른아홉이 되던 해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질러보자’는 재밌는 가풍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여러 가지를 한 번에 하시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인지 두 오빠도 작사, 작곡을 하고 영화도 연출하고 그래요. 저도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공연을 하곤 했죠. 그게 일상이었어요. 새로운 걸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이 적었죠.

본격적으로 영화 얘기를 해봐요. 시작은 무엇이었나요?
마흔이 넘어 연극배우로서의 제 경험을 녹인 <분장실>, 아들을 잃은 엄마를 다룬 <영향 아래의 여자> 같은 단편영화를 연출했어요. 단편영화가 영화제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 보니 감독으로서 조금 더 긴 시나리오를 쓰고 장편을 연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죠. 그맘때쯤 결혼 5년 만에 아이를 가졌어요. 유산의 경험이 있던 터라 아이에 대한 애착이 너무 컸죠.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불안도 컸고요. 엄마가 되는 과정은 어려웠고, 출산 후에는 우울증이 찾아왔죠. 산후우울증에 걸리면 세상의 모든 아이가 내 아이처럼 보여요. 뉴스에서 아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냥 눈물이 흐르고 겁도 났죠. 내 아이에 대한 애착이 깊어질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시선이 쏠렸죠. 그 시기 북한의 고아들, 일명 ‘꽃제비’와 관련한 사진을 봤고, 왜 이런 아이들이 생겼을까 궁금했어요. 북한에 90년대 중반 큰 가뭄이 들어 300만 명이 죽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됐고요. 그러던 중 지인이 운영하는 출판사에 갔다가 폴란드에 한국전쟁 고아가 보내졌다는 소식을 접했죠. 처음으로 분단의 아픔이 현실로 느껴졌어요. 한국 사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실화를 사람들에게 드러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일련의 사건들이 운명의 흐름처럼 다가왔죠.

원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나요?
관심은 있었지만 대중 앞에 내비칠 기회가 없었어요. 영화는 순전히 제 우울증 경험에서 시작되었죠. 4년 전 자료 조사차 폴란드에 간 적이 있어요. 그곳에서 한국전쟁 당시 고아들을 돌보던 지도교사들을 만났고, ‘연세 많으신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누가 이 사건을 증언해주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극영화 <그루터기> 제작을 조금 미루고 다큐멘터리를 먼저 만들기로 결심했죠.

JTBC <뉴스룸>을 포함한 각종 뉴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고, 김대중노벨평화영화상도 받았어요.
영화가 아무래도 북한과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시대적인 요구와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사실 영화를 만들며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개봉이 어려웠던 순간도 있었어요. 남북정상회담에 가장 기뻐했던 국민이 저였을지도 몰라요. 의도하지 않았든 의도했든 감춰진 역사이자 실화이기 때문에 현 사회와의 접점이 많더라고요. 영화 <어벤저스>도 2주 만에 내리는 것이 현실인데, 두 달 가까이 상영되며 4만600명이 봐주셨어요. 아동 NGO, 대학생, 직장인 단체 관람도 많았고요.
내레이션과 연출이 참 담백하게 느껴졌어요. 산후우울증을 앓았다는 것을 고백하며 영화 앞부분에 아들도 함께 출연한 것도 놀라웠고요.
많이 덜어냈죠. 1차 편집본을 보면 완전히 다른 영화 같아요. 허구의 이야기나 흥미 있는 주제가 아니라 제 경험에서 비롯된 영화이기 때문에 아이와의 일상이 녹아들 수밖에 없었죠. 역사가 개인의 삶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개인의 상처와 역사의 상처가 만나는 접점이 있다는 걸 직접 깨달았으니까요.

연출하면서 힘에 부치기도 했을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 자체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명감을 심어주는 장르라 힘이 들기도 했죠. 다른 사람이나 방송국에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늘 ‘이 아픈 역사를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누군가는 드러내야 한다’고 되뇌었어요. 개봉 예정인 극영화를 위해서라도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야 할 것 같았고요. 실제로 최근 한 방송사가 아이들의 송환 이후 이야기를 알아보고 있어요.

실제 탈북 청소년들이 나오는 점도 인상 깊었어요. 폴란드로 함께 간 북한 소녀 이송 씨는 어떻게 지내나요?
탈북 청소년들을 다음 극영화에도 캐스팅하고 있어요. 북한, 남한 아이들이 함께 하면 영화가 더욱 의미 있을 거라 생각했죠. 송이는 동국대 연극과에 입학했는데, 동기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질문도 받고 엄청 인기 있다고 해요. 사선을 넘는 탈북 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았는데, 격려와 함께 그때의 상처를 존중받는 기분을 느낀다고 말해 기뻤죠.

영화를 통일에 대한 메시지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영화를 통일로 귀결하고 싶진 않아요. 통일이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긴 여정이잖아요. 단순히 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죠. 저는 영화를 통해 푸른 눈의 선생님들이 역사의 상처,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걸 조명했을 뿐이죠.

극장에서 내가 만든 영화를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20년간 배우로 활동하며 받은 관심과 감독으로서 받는 반응은 굉장히 다르더라고요. 인간 추상미의 생각을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평가받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더 설레기도, 두렵기도 하고.

두 편의 단편영화와 이번 다큐멘터리까지 모두 모성이 주제예요. 추상미에게 모성이란 어떤 감정인가요?
산후우울증이라는 혹독한 모성을 겪었잖아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큰 영향을 미쳤죠. 아버지는 오빠 둘 아래에 외동딸로 태어나 저를 마스코트처럼 데리고 다니셨어요. 제가 열네 살 때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그때 받은 너무나 큰 충격을 표현하거나 풀어낸 적이 없었어요.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그 슬픔이 수면 위로 드러났죠.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고 억눌린 감정이 표출되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 굉장히 큰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그 후유증처럼 아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후 시선이 다른 아이들, 전쟁 고아들, 세상을 향하게 되면서 그 상황을 극복하게 됐어요.

힘든 시절 가족이 가장 큰 위안이 되었나요?
가족이 존재한다는 자체로 위안이 됐지만, 남편은 가장으로서 일을 많이 하던 시기였어요. 제가 일을 안 하던 때라 남편이 더 분주하게 움직였죠. 저 스스로 다른 일에 몰두하면서 극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폴란드 여정에서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어도 아이들을 잊지 못하는 선생님들이 겪은 엄청난 상처를 함께 얘기하고 공감하면서 치유를 받기도 했어요. 북한 고아들이 폴란드 땅을 밟았던 바로 그 나이에, 이분들도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 특별했죠.

아버지는 배우로 유명하셨지만 연극 연출도, 각색도 하셨죠. 음악도 작곡하고,
무대장치까지 직접 만들며 다방면으로
예술가적 면모를 보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연출과 연기의 경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엄청난 몰입을 요구한다는 점과 온 마음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점은 똑같죠.

20년간의 배우 활동, 감독 데뷔 등 그동안의 커리어를 돌아보면 어떤가요?
배우로 활동하면서 좋은 경험을 참 많이 했어요. 연출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죠.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는 속담처럼 저는 스스로 하고 싶고 납득이 돼야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타입이에요. 연출에 미쳐 있다가 문득 카메라 앞에 서거나 연극을 하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역할에 한계를 두지 않을 것 같아요. 제 영화 속에서 남들이 안 하려는 자투리 역할에도 도전해볼 수 있고요. 저는 특히 아녜스 자우이 감독을 좋아해요. 자신이 연출한 영화 <타인의 취향>(1999)에 출연해 훌륭히 제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부러웠어요.

배우 경험이 있으니 감독으로서의 욕심이 남다르겠죠.
여전히 여성 캐릭터의 한계가 존재해요. 보다 생생하고 주도적인 여성 캐릭터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미스백>도 그렇고, 여성 감독이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그루터기>에서도 폴란드 선생님 중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고, 의미 있는 역할을 하겠죠.

바빠도 가족과의 시간은 남겨두는 편인가요?
그동안 남편이 바빠서 항상 미안해했는데 이제 자기가 도와줄 수 있으니 더 좋대요. 늘 함께 시간을 보내는 부부가 있는 반면, 저희처럼 본인의 분야에 열정을 쏟는 부부도 있죠. 가끔이지만 온전히 함께 시간을 보내면 나눌 얘기가 아주 많고 대화 주제가 굉장히 풍성해진다는 장점이 있어요. 요즘 남편은 이런 얘길 자주 하죠. “네가 봉준호나 박찬욱이 되어도 네 영화에 절대 출연하지 않을 거야.”

왜일까요?
감독과 배우를 상하관계로 생각하더라고요. 상하관계가 아니라 협업하는 관계라고 말하면, “너랑 나는 그런 관계가 안 될 것 같아” 하더라고요. 하하.

앞으로 엄마이자 감독으로서 추상미의 목표가 있다면요.
아들 지명이가 안목이 높은 사람, 그런 문화 소비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아이들이 콘텐츠를 접하는 것이 염려스러운 일이잖아요. 무책임하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노출되기 쉬우니까요. 제 욕심으로는 아이가 좋은 콘텐츠를 골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췄으면 해요. 제가 먼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죠.

엄마와 감독으로서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것 같네요.
공과 사를 너무 명백히 나누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엄마와 아이가 손잡고 볼 수 있는, 그러고 나서 건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아이가 좋은 콘텐츠를 골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췄으면 해요. 제가 먼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죠. 엄마와 아이가 손잡고 볼 수 있는, 그러고 나서 건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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