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이터 임은수의 빛나는 시간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팅 선수 임은수, 춤추는 걸 좋아하던 천진난만한 소녀가 당당한 스케이터로 성장하는 길에는
엄마 이규숙 씨의 동행이 있었다.

플라워 프린트의 시스루 드레스는 코치, 버건디 웨스턴 부츠는 찰스앤키스.

지난해 11월, ISU(국제빙상연맹)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국내 여자 선수로는 김연아 이후 9년 만에 메달을 따 주목받은 선수가 있다. 올해 17세, 만으로 15세가 된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팅 선수 임은수. ‘포스트 김연아’로 꼽히며 등장한 스케이팅 천재 소녀에게 더욱 호기심이 생긴 건 한 뉴스에서 앵커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난 이후다.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앵커 앞에서 떨리는 기색은커녕 또렷한 목소리로 말끝 한번 흐리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싱긋 웃는 모습. 앳된 얼굴을 잊게 할 만큼 성숙한 애티튜드가 돋보였다. 그녀의 든든한 매니저이자 때로는 친구 같은 엄마 이규숙 씨와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5차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고 돌아온 임은수 선수를 만났다.

엄마의 교육법 1 
아이 스스로 책임감과 결단력을 배우게 할 것
임은수 선수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신장이 건강하지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항생제를 다량 투여했고, 완치 후에도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불리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폐렴, 장염을 앓을 만큼 허약했다. “아이가 워낙 흥이 많고 춤추는 걸 좋아했는데, 일곱 살 즈음 어느 날 TV에서 김연아 선수를 보더니 ‘엄마, 나 반짝이는 옷을 입고 저렇게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 하더군요. 계속 졸라대서 어쩔 수 없이 스케이트장에 데리고 갔는데, 갈 때마다 감기몸살을 앓았어요.” 일주일간 앓고 나면 다시 가는 과정이 반복되자 엄마는 걱정이 되어 스케이트장에 가는 걸 말렸다. 게다가 당시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는 워킹맘이었기에 왕복 세 시간 거리의 스케이트장에 가는 일이 쉽지 않았고, 딸이 좀 더 다양한 길을 익히길 바랐다. 스케이트 선수가 되고 싶다며 떼를 쓰는 딸에게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시작은 네가 쉽게 결정할지 몰라도 끝은 쉽게 포기할 수 없어.”
주위에서는 모질다고 했지만 딸이 스스로의 꿈에 더욱 진중하길 바랐다. 그래서인지 임은수 선수는 국가대표로 발탁된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고된 훈련을 받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엄마에게 먼저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코치에게 호되게 혼난 날이면 친구들에게 은수가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일을 해야 했기에 2년 전 일을 그만두고 전적으로 딸의 훈련을 돕기 전까지는 다른 선수 엄마들과 달리 훈련장과 대회 자리를 함께 지키지 못한 적이 많았다. 늘 자신의 결정을 책임질 것을 강조하는 엄마는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며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딸은 그런 엄마를 보며 주체적으로 꿈을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자랐다.

엄마의 교육법 2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걸 즐거운 일로 만들 것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뽐낼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면 실컷 까불다가도 쭈뼛거리는 아이가 있는 반면 주인공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이도 있다. 엄마는 직관적으로 딸이 후자인 걸 알았다. 스케이트를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만난 코치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흔히 스케이팅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넘어지는 걸 두려워해 표정이나 동작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데, 은수는 눈빛과 표정에 집중한다고 했다. 딸의 재능을 알아본 엄마는 무대를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쳤다.
“피겨는 ‘Crazy’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운동이에요. 피겨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3일만 쉬어도 되던 동작이 잘 안 되고, 4일을 쉬면 8일에서 16일을 연습해야 따라갈 만큼 혹독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하죠. 본인이 원하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피겨 선수가 되길 바라고 훈련을 시키던 아이가 스케이트 버리고 도망가는 경우도 자주 봤고요. 그만큼 힘든 운동이고, 좋아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에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에 의미를 두기보다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각종 무용 콩쿠르와 작은 대회에도 참가하게 했다. 상을 받지 못해도 결과를 탓하거나 아쉬움을 내색하지 않고 항상 “한 사람이라도 네 무대를 보며 즐거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의미가 있어”라고 말해줬다. 이런 경험에서 길러진 담대한 경기 자세가 국제 경기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차분한 태도로 긴장을 조절하며 큰 대회를 잘 치러냈다. 그래도 떨리지 않냐는 질문에 임은수 선수는 무대가 떨리는 건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이고, 과거에도 지금도 긴장감을 즐기듯 극복해 나가는 중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엄마의 교육법 3
아이 혼자만의 시간을 존중할 것 
‘꼬부기’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는 임은수 선수는 스스로를 ‘혼자 놀기의 달인’이라고 말한다. 훈련 시간이 끝나면 요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카톡 채팅, 유튜브 메이크업 영상을 보고 따라 해보거나 베이킹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땐 김연아 선수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나도 그런 적 있어.” “끝났어. 다음에 더 잘하면 돼”라는 시크한 답장을 받곤 한다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때면 만화 카페에서 만화책을 보며 수다를 떨거나 화장품 매장에서 새로운 제품을 구경하는 영락없는 10대 소녀의 모습이다. 엄마 역시 친구를 자주 만날 수 없는 딸이 자신을 가꾸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응원해준다. 평상시는 물론 모든 경기 메이크업을 스스로 할 만큼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 주위 선수들이 임은수 선수에게 메이크업을 받길 원할 때도 있다. 경기 드레스와 콘셉트를 정할 때도 주관이 확고한 편이다.
“대회를 끝내면 함께 화장품이나 옷을 쇼핑하기도 해요. 의상 콘셉트를 정할 때 의견이 다르면 ‘엄마는 예전에 패션과 관련한 일을 했지만 이제 트렌디하지 않아’라고 말하기도 하더라고요. 하하.”
임은수 선수의 인스타그램(@ggobugi_eunsoo)에는 패션 센스를 엿볼 수 있는 사진도 많다. 때때로 경기가 끝나거나 반복된 훈련으로 우울해할 때도 엄마는 굳이 감정을 묻기보다는 말없이 함께 음악을 듣거나 일 년에 한 번씩 떠나는 가족 여행을 계획해 제안하는 편이다.
“딸은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아본 셈이죠. 제가 엄마라고 해서 그 삶을 오롯이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 알고 이해하는 척하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옆을 지키며 저도 딸도 성장하는 중이에요.”

이제 갓 시니어 데뷔를 마친 임은수 선수. 최근에는 아사다 마오의 코치이기도 했던 라파엘 아르투니안 코치에게 사사받기 위해 엄마 이규숙 씨와 LA에서 8개월간 생활하기도 했다. 모녀가 같은 꿈을 향해 걸어가는 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어떤 스케이터가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늘상 ‘예술성 있는 스케이터, 감동을 줄 수 있고 관객과 소통하는 스케이터’를 꿈꾼다고 답하는 그녀에게 지금처럼 단단한 조력자인 가족과 함께 건강하게 빛날 앞날이 있기를 응원한다.

딸은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아본 셈이죠. 제가 엄마라고 해서
그 삶을 오롯이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 알고 이해하는 척하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옆을 지키며 저도 딸도 성장하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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