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엄마, 페미니스트

“지금 일상에서 나,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 할 수 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합니다.”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느냐는 질문에 부너미 모임 엄마들의 답이다.

왼쪽부터 아이린, 신나리, 양효규, 이성경 작가.

2016년 발간된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국내 밀리언셀러를 넘어 일본 아마존 북 섹션의 아시아 문학 1위 자리에 올랐다. 이제 페미니즘과 관련된 책들이 대형 서점 매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흔히 페미니스트 하면 비혼, 비출산을 동일 선상에 두곤 한다. 결혼 후 페미니즘을 받아들인 엄마들은 맘 카페에서도, 어떤 모임에서도 할 수 없는 담론을 나눌 창구가 필요했다. 가사 불평등, 시댁, 육아 문제를 겪는 현재 한국 기혼 여성의 시선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고민하고, 읽고, 썼다. 엄마 열 명이 꾸린 페미니즘 모임 ‘부너미’의 책 《페미니스트도 결혼하나요?》는 그렇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투고란에 썼던 글을 2년간 다듬은 끝에 출간 되었다.


첫 모임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이성경(이하 이) 결혼하고 출산한 뒤 페미니스트가 됐어요. 일반적인 페미니스트 모임에도 여러 번 참여했지만, 결혼 생활을 하고 아이를 기르며 일상에서 몸소 느끼는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죠. 《빨래하는 페미니즘》, 《슈퍼우먼은 없다》 같은 해외 기혼 여성의 삶을 말하는 책은 많지만 국내 기혼 여성 페미니스트의 생각은 드물었고, 이를 더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그 방편으로 SNS를 통해 멤버를 모아 함께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엄마들 모임 ‘부너미’를 만들게 됐죠.

내 생활의, 나의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요.

신나리(이하 신) 저에게 페미니즘은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에요.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느끼면 갈등을 피하지 않고 드러내고 문제를 제기할 용기를 얻게 됐어요. 이를테면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으로 참아야지’ 하고 언쟁을 피해버리거나 참다가 싸우고 난 뒤에도 냉기를 못 견디고 먼저 사과해버리곤 했어요. 하지만 이제 위축되지 않고 불만이 있으면 즉시 말하죠. 억지로 평화로움을 이끌어내려고 하지 않게 됐어요.이 모임 멤버의 어머니께서 어떤 책을 냈냐고 물으시더래요. ‘엄마 혼자만 밥하지 말라고, 같이 하자고 하는 얘기야’라고 하니 ‘되게 좋은 거네’라고 하시더래요. 지금 우리 사회는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정치적 이슈로 생각해서 어렵게 여기는 것 같아요. 여성으로서 맞닥뜨리는 디테일하고 사소한 일상의 갈등을 푸는 게 우리가 말하는 페미니즘이에요.

페미니즘이 사회의 최대 이슈, 남녀 갈등의 중심에 선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해요. 오랜 시간 페미니즘을 공부해온 학자들처럼 대표성을 띠는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주기보다는 자극적인 사람들만 쫓아다니며 페미니즘이 낯선 일반인에게 욕먹기 좋은 프레임을 짜놓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 상태가 안타까워요. 신 표준 모델로 끼워 맞추는 것이 우리나라의 흔한 방식이잖아요. 페미니즘도 단 하나가 아니라 주체에 따라 다양한 갈래가 있어요. 저희 모임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결혼한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모두 같다고 생각하지만 소득 수준, 가치관, 연령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죠. 하지만 서로 무슨 얘기를 하든 공감하고, 듣고, 받아들여요. 사상 또한 모든 사람에게 일치하는 사상은 없잖아요. 예를 들어 민주주의도 누구에겐 의회민주주의, 누군가에겐 직접민주주의가 이상적인 사상인 것처럼요. 우리 사회에서는 한쪽에서 지향하는 급진적 페미니즘이 더 많이 부각되어온 거죠. 완벽한 하나의 페미니즘은 존재할 수 없다고 봐요.

페미니스트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으면 어때요?

아이린(이하 린) 이기적인 엄마라는 딱지가 따라붙죠. 자신에게만 집중하느라 모성이 부족한 엄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하지만 아이를 충실하게 키우는 것이 누군가에겐 페미니즘의 실천이 될 수도 있죠. 저희 멤버들도 어떻게 해야 아이를 더 좋은 방향으로 기를지에 대해서 어떤 엄마들 못지않게 더 열심히 고민해요.

페미니즘을 만나고 난 뒤 직접적인 일상의 변화가 있다면요?

린 수세미 소독하기, 쓰레기통 비닐 교체, 냉장고 속 음식 정리하기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집안일들, 흔히 ‘그림자 노동’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내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못했을 때 죄책감을 느꼈죠. 하지만 페미니즘을 만나고 난 뒤 ‘왜 나만 해야 하지?’ 하고 스스로 묻게 되었어요. 대개 결혼을 앞두고 결혼식만 준비하지 가사노동 분담 리스트 같은 걸 상의하지는 않잖아요. 부부가 함께 살면서 가사노동은 어떻게 분담할지, 서로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얘기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신 우리 뼛속에 숨어 있던 ‘현모양처 유전자’가 튀어나와서 왠지 잘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거죠. ‘여자들이 집안일을 더 잘하니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세대는 집안일을 안 하고 크는 여자들이 많잖아요. 독립하지 않고 부모님과 쭉 같이 살다가 결혼하는 경우에는 더욱이요. 그런 압박감에서 벗어났어요. 또 제가 주말에 외출하면 남편은 같이 아이를 볼 수 있는 다른 남편들을 찾더라고요. 그럼 그 집 엄마에게도 자유 시간이 생기는 셈이죠. 사회적인 변화와 개인의 삶의 변화가 맞물려가는 거예요. 양효규(이하 양) 맞벌이를 하는데 아침을 남편이 차리기 시작했어요. 시댁에 가서 식사할 때 밥 차리는 걸 도와달라고 하면 “엄마는 우리에게 밥 차려주는 게 행복이셔” 하던 사람이니, 큰 발전이죠.

아이를 기르면서 성 평등이나 페미니즘과 관련 있는 고민을 담은 양육 방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양 딸아이가 인형보다 우주선이나 차를 좋아해요. 그러면 주위 어른들이 ‘왜 여자아이가 자동차를 가지고 노냐’고 묻곤 하죠. 그럴 땐 즉시 아이에게 ‘여자라서 안 되는 건 없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라고 말해줘요. 어른들이 놀라기도 하지만, 갈등 상황을 피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다른 사람들 기분이 아니라 아이의 가치관이니까요. 또 어린이집에서 ‘파란색은 남자 색’이라고 배우고 온 아이와 함께 ‘파란색’에 관한 전시를 보러 가기도 했어요. 파란색은 남자 색이 아니라 매력적이고 다채로운 색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요. 신 아이가 볼 수 있는 첫 번째 롤모델은 엄마잖아요. 아빠도 집에서 요리하고 집안일을 하고, 엄마도 아빠처럼 일하고. 이런 동등한 상태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보이도록 노력해요. 그러다 보니 여섯 살 딸이 ‘이건 내가 어질렀으니까 내가 치울게’ 하고 말하기도 해요. 린 저는 아들만 있어서 고민되는 부분이 좀 많아요.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인데, 대표적인 것이 ‘여자’, ‘남자’라고 말하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는 거예요. ‘남자는 힘이 세잖아’라는 말이 싫었는데, 이젠 ‘OO은 힘이 세’라는 식으로 말해요.

이 아이가 너무 예뻐서 뽀뽀를 부르는 비주얼이지만 늘 스킨십을 하기 전에 허락을 구해요. 아기 때부터 ‘남자든 여자든 너의 몸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고 네 몸의 주인은 너다’라는 식으로 가르쳤어요. 그래서 아이들은 ‘오늘 뽀뽀할 기분이 아니야’라고 솔직하게 대답하죠. 아이들이 뽀뽀할 기분이 아니어도 어른들이 좋아하니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대화를 통해 알았어요. 아이도 스킨십을 원할 때 ‘내가 엄마를 안아봐도 돼?’라고 묻기도 하고요.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성 인지 감수성이 길러진다고 생각해요.

나에게 가장 크게 영감을 주는 여성은 누구인가요?

양 경제적 가장이었던 엄마. 엄마는 절 항상 보수적으로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제가 최근 취미로 축구 모임에 가입했는데 엄마에게 말하면 ‘여자애가 무슨 축구냐’고 하실 줄 알았죠. 그런데 ‘공 가지고 노는 거 재밌지?’라고 물으시더라고요. 반전이었죠. 생각해보니 엄마는 고등학생 때부터 핸드볼팀 주장이셨고 직장에 다니면서도 배구를 하셨어요. 오히려 저는 축구는 여자가 할 만한 운동이 아니라 생각했고요. 어떤 면에선 엄마가 저보다 더 깨어 있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신 인문학자 고미숙 선생님과 정희진 선생님. 고미숙 선생님은 여성들에게 ‘탈가족주의’를 주창하시는데 ‘일이 없어도 밖에 나가 누군가를 만나라, 가족만이 전부라 생각지 말고 우정 어린 관계를 쌓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파하시죠. 늘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어요. 또 정희진 선생님은 오랜 시간 여성학을 연구해온 학자이신데, 항상 약자를 위한 일에 앞장서세요. 주류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분인데도 언제나 비주류를 품고 사는 점이 존경스럽죠. 바로 그 점이 페미니스트 정신과 부합하기도 하고요.

책을 내고 모르는 이들 앞에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경험, 어떤가요?

양 트위터나 기사를 통해 악플러들에게 욕을 많이 먹기도 했어요. 그럴수록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책을 낼 때도 더 길게 쓰고 싶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보는 점에 매료되었거든요. 악플은 어쩔 수 없고, 너무 괴롭거나 힘들면 정신과에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하. 이 결혼하고 출산한 여성들이 하는 얘기들이 도처에 널렸는데, 글로 써서 게시함으로써 이렇게 사회적인 얘기가 되는 점이 의미 깊어요. 흘러넘쳐서 사라질 수 있는 이야기를 누군가는 한번쯤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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