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여백

촘촘히 채워진 서양식 센터피스와 달리, 여백과 선을 강조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모던하게 재해석한 요즘 한국 꽃꽂이.

라일락과 엽란, 달항아리와 아크릴, 공기 그릇의 매칭으로 변주를 통한 균형을 표현한 작품. 

불균형 속의 균형을 찾는 과정 비욘드앤 김형학 @kimhyunghak_leo

독일 연방정원박람회(BUGA), 아시아컵 플라워 디자인 대회, 일본 국제 가든&플라워쇼 등 다수의 국제 대회에서 수상하며 세계적 플로럴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김형학. 최근 블루보틀 성수점과 삼청점의 플라워 어레인지먼트를 맡아 미니멀리즘 콘셉트를 기반으로 한국적 미와 정서를 표현해 주목받고 있다. 자연스러운 균형을 중시하되 불균형적인 요소로 변주를 주어 전통 꽃꽂이를 탈피한 동시대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작품의 특징. 신당동 작업실에서 그의 유연한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블루보틀 작업 이후 더 바빠졌나요? 블루보틀과 일한 뒤 다양한 제안이 들어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진짜 블루보틀에 열광하는구나’ 하고 느꼈죠. 흔히 제가 개성적인 작업만을 선호할 거라 생각하지만, 반복된 작업도 즐기고 다양한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과정도 좋아해요. 여러 의견이 모일수록 고민이 깊어지고 영감을 받기도 해서 또 다른 스타일을 시도해볼 수 있으니까요. 블루보틀의 어레인지먼트 역시 글로벌 본사와 계속 대화를 하면서 조율해나가는 중이죠.

꽃을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라고 들었어요. 남들과 다른 본인만의 스타일은 무엇인가요? 불필요한 낭비를 막기 위해 ‘꼭 써야 할 꽃은 무엇일까?’ 계속 자문하고, 본질적인 것만 남겨두기 위해 집중해요. 그게 자연이 주는 메시지잖아요. 살생이든, 자원 낭비든 모두 필요 이상 소비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죠. 꽃의 미학도 그런 것 같아요. 필요한 만큼만 썼을 때 가장 저다운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불필요한 낭비를 막기 위해 ‘꼭 써야 할 꽃은 무엇일까?’ 계속 자문하고, 본질적인 것만 남겨두기 위해 집중해요. 그게 자연이 주는 메시지잖아요.”

채우기보다 비워내기가 어렵죠. 이렇듯 간결한 미감은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지니고 있는 자질이라 생각해요. 이 땅에서 40년 가까이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백이 있는 스타일을 추구하게 됐죠. 만약 다른 나라에서 성장했다면 더 많은 꽃을 썼을지 모르죠. 또 행크뮬더, 그레고르 레아쉬에게 꽃을 배우며 독일식의 건축적 조형미를 체득했어요. 그래서 제 작품을 보고 건축적인 요소가 느껴진다고 하는 분도 많고요.

지금 동시대적인 한국 꽃꽂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제가 한국 꽃꽂이 자체를 정의하거나 언급할 순 없어요. 고증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일부 협회에서 전통 꽃꽂이를 계승하고 있죠. 단, 저는 동양 꽃꽂이 전반에서 강조하는 선, 면, 형태 같은 절제된 규칙을 받아들이되 규칙에 갇히는 걸 늘 경계하려고 해요. 규칙을 바탕으로 균형을 쌓아 올렸다 무너뜨리는 방식, 균형과 불균형 사이에서 민감하게 조율하는 것이 제 의도와 방식이에요. 또 예전에 고집했던 침봉 같은 소재나 과거의 기술만을 답습하진 않고, 요즘 시대에 더 좋은 소재나 방식이 있으면 따르는 편이죠.

오늘 보여준 다양한 플라워 어레인지먼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나요? 전통적인 기법을 한 번씩 비틀었어요. 가령 전통적인 꽃꽂이에서는 꽃을 꽂는 침봉을 보이지 않게 수반이나 화기에 넣곤 했는데, 저는 그대로 드러냈어요. 그리고 하나의 가지를 비대칭적으로 높이 올리거나 선이 굵은 줄기들을 활용했어요. 이렇게 불균형적인 요소에 아크릴, 케이블 타이, 테이프, 플로럴 폼 같은 다양한 물성의 현대적 요소를 가미해 시각적인 균형을 맞추려 했죠. 저는 변주를 통한 균형을 즐기는 편이에요. 가령 동양적인 달항아리 화기에 서양적인 아크릴, 그 위에 동양적인 공기 그릇을 놓는 식이죠. 대부분의 작업이 1분 안에 직관적으로 완성돼요.

줄기의 선과 꺾임이 이루는 불규칙한 선을 표현한 작품.

인스타그램 계정에 작업물을 자주 공유하네요. 동양 꽃꽂이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점차 늘어난다고 느끼나요?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의 꽃 어레인지먼트와 관련한 전반적인 수준이 점점 올라간다는 걸 체감해요. 시대에 따라 유럽 스타일에서 미니멀한 스타일로 유행의 흐름이 바뀌듯, 취향이 변하고 다양해지는 것은 좋다고 생각해요. 한국인의 특성 중 하나가 뭐든 빨리 적용하고 시도하는 점이잖아요. 디자인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나라 꽃꽂이의 전체적 수준이 올라간다면 더 많이 나누고 공유해야죠. 저는 사람들이 꽃을 좀 더 친근하게 향유하면 좋겠어요. 꽃이 전달하는 가치는 누가 뭐래도 아름다움에 있으니까요. 개성을 추구하되 보기 편안한 작품을 선보이는 게 변함없는 제 목표예요.


“한국 꽃꽂이 고유의 미감은 어떤 방향에서 봐도 예쁘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앞부분만 화려한 유럽 꽃꽂이와 달리 옆과 뒤에서 봐도 곡선의 미가 살아 있는 ‘다방화’인 거죠.”

책거리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서아현의 어레인지먼트.

우리 것, 우리만의 미감 비트윈버스데이 서아현 @betweenbirthdays

초록, 파랑, 빨강, 주황. 단청을 연상시키는 색감과 민화 속 책가도를 재현한 고전적인 구성. 플로리스트 서아현은 가장 전통적인 모티프에서 영감을 받아 어레인지먼트를 완성하지만, 자신만의 발상을 더해 올리브마켓, 연남방앗간 등 트렌디한 공간에 입점하고 위워크, 파타고니아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하는 비주얼 작가다. 영국 클라큰웰 디자인 위크에서 자유직립형의 한국 꽃꽂이를 선보이는가 하면, 첼시 플라워쇼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감각적인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모더나이즈드 코리안 디자인’, 즉 한국적 선, 공간, 색, 사상의 현대적 재해석을 방향성으로 내걸고 있죠. 어떤 계기로 한국적인 꽃꽂이를 시작하게 됐나요? 꽃을 만져온 지는 10년. 광고 회사에서 7년간 콘텐츠 기획자 및 아트 디렉터로 일하면서 꽃을 가미한 스타일링을 해오다가 몇 해 전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저는 원래 파스텔 톤을 좋아하지 않은 데다 유러피언 스타일이 메인스트림이 되면서 더 흥미를 잃었어요. 빨강, 초록 같은 원색과 미니멀한 형태를 추구해왔는데, 그게 동양적인 꽃꽂이와 연관된 줄은 모르고 그저 직관적으로 해왔죠. 한국 꽃꽂이를 제대로 배우게 되면서 철학부터 디자인까지 모든 점에 매료됐어요. 오래된 방식이지만 요즘 문화, 디자인, 생각과 부합하는 면이 되게 많아서 오히려 현대적으로 느껴지는 점이 재밌어요.

꽃꽂이 영감은 어디에서 얻나요? 한국의 미와 관련한 책이나 전시, 문헌 등 시각적인 자료를 많이 접하려고 노력해요. 원로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으면서 꽃을 꽂아온 스승의 오랜 세월에서도 새로움을 얻고요. 한국 꽃꽂이 자체에 대한 사료는 많이 남아 있진 않아도, 전통 자수나 그림 등에 표현된 꽃의 생김새를 찾아보고 따라 해보곤 하죠. 또 신사임당의 그림이나 근대 미술가 이인성, 김용준 작품에 있는 꽃에서도 영감을 받아요.

오늘 보여준 어레인지먼트는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했나요? 책거리를 모던하게 해석했어요. 한국 전통 꽃꽂이에선 주, 종, 역의 세 가지 선을 살린 직립형 방식을 주로 사용해요. 오늘은 지금의 계절인 여름과 잘 맞는 장록수가 주, 종, 역의 세 가지 선을 한 번에 담당할 수 있도록 구성해봤어요. 또 질감에 변주를 주기 위해 산더소니아, 오이초 같은 가는다란 줄기와 트리토마, 안수리움처럼 동양 꽃꽂이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국적인 꽃들을 함께 사용했죠. 동양 꽃꽂이에서는 가장 세고 화려한 색감의 꽃을 아래에 두는 게 특징이에요. 그래서 다크한 해바라기와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등장하는 맨드라미와 똑같은 모양의 꽃을 아래에 배치했죠. 요즘 유행하는 매트한 소재의 꽃병과 놋그릇을 함께 두어 전형적인 화기를 탈피하도록 구성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구분되는 한국 꽃꽂이만의 미감은 무엇인가요? 어떤 방향에서 봐도 예쁘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앞부분만 화려한 유럽 꽃꽂이와 달리 옆과 뒤에서 봐도 곡선의 미가 살아 있는 ‘다방화’인 거죠. 이 점을 깨닫고 나니 전통 건축물도 미감을 공유하는 것 같아 더 흥미롭게 느껴져요.

해외 전시에 참여했을 때의 반응이 궁금해요. 런던 클라크웰 페어에는 신진 디자이너나 건축,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많이 와요. 제 꽃꽂이를 설명할 때 ‘여백의 미’를 뭐라고 할까 하다가 ‘Negative Space’라고 했어요. ‘음의 공간’이라는 뜻이죠. 그냥 여백이라고 표현하기보다 음양은 외국 사람들도 다 아는 개념이잖아요. 여지껏 예쁜 꽃의 얼굴만 봤다면, 꽃과 꽃 사이의 공간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을 하니 쉽게 이해하고 반응도 뜨거웠죠.

앞으로 어떤 작업을 볼 수 있나요? 한국적인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상업적으로 풀어가는 방안도 고민해보려 합니다. 디자인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맞는 브랜드와 작가 분들과 컬래버레이션 작업도 더 많이 해보고 싶어요.


느긋한 시선으로 꽃을 향유하는 법 청록화 신선아 @chungrokhwa_

경의선 숲길 옆, 작은 골목길에 들어서면 오랜 정취와 따뜻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한옥이 눈에 띈다. 햇빛이 잘 드는 중정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다도를 위한 소품과 갖가지 빛바랜 소품들이 소담하게 채워진 곳. 바로 플로리스트 신선아가 운영하는 플라워 숍 겸 앤티크한 소품 숍 ‘청록화’다. 소녀시대 ‘Holiday’, 엑소 ‘Ko Ko Bop’, 레드벨벳 ‘Would You’ 등 화려한 뮤직비디오의 플라워 스타일링을 도맡아온 그녀는 빠른 유행과 흐름에서 벗어나 느긋하고 편안하게 꽃을 즐길 수 있도록 최근 공간을 마련했다. 들꽃, 야생화처럼 소담한 매력의 꽃들을 국내 작가들의 보자기, 바구니, 공기 그릇에 꽂는 방식으로 그녀와 취향과 감성이 똑 닮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청록화’라는 이름이 이색적이네요. 여유롭게 꽃을 즐겼으면 하는 바람에, 꽃과 함께 시를 적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조지훈, 박목월 같은 청록파 시인들이에요. 산, 꽃, 동물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한 작가들인데, 이들의 시 같은 꽃꽂이를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짓게 됐죠.

서까래가 남아 있는 한옥이 매력적이에요. 볕이 잘 드는 공간을 몇 달간 찾아 헤매다 100여 년 전에 지어진 한옥을 발견했어요. 여러 번 리모델링한 데다 철문 때문에 볕이 잘 들지 않던 집을 석 달간 보강했죠. 이전에 공간 디자이너로 일해왔기에 여행을 하며 모은 앤티크 소품과 할머니의 고가구 등으로 직접 꾸몄어요.

최근엔 국내 신진 작가들과 ‘청록상회’라는 마켓을 열기도 했죠. 꽃을 스타일링하다 보면 화병뿐 아니라 다양한 공예품을 많이 사용하게 돼요. 평소 좋아하는 16개의 브랜드를 모아 이곳에서 마켓을 꾸렸죠. 지승민의 공기 같은 한국적이고 담담한 매력이 드러나는 그릇이나 소품에 자연스레 마음이 끌려 클래스에서도 사용하고 있어요. 다도가 취미이기도 해서 약재나 허브티를 재해석하는 ‘담비의 차실’과 차회를 열기도 하고요.

수업 방식이나 청록화만의 꽃꽂이 스타일이 궁금해요. 동양 꽃꽂이의 특징처럼 꽃과 꽃 사이 바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둬요. 아무리 예뻐도 위화감을 주는 작업은 선호하지 않아요. 뮤직비디오나 상업적인 일을 하며 늘 크고 빽빽하게 채우는 작업을 하면서 꽃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피로감을 느끼곤 했거든요. 클래스에서도 늘 덜어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수업 후 꽃을 따로 싸갈 수 있도록 하죠. 꽃의 종류도 과꽃, 사과꽃, 호박꽃 같은 토속적인 느낌의 꽃이나 야생화를 쓰려고 해요. 우리가 길에서 쉽게 보거나 일상적인 꽃들을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꽃꽂이를 하고 싶어서요.

오늘 보여준 어레인지먼트는 어떤 영감에서 비롯됐나요? 가지를 중심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해 어울리는 흐드러진 줄기를 살려두고, 과꽃이나 연밥 같은 수수한 친구들을 침봉꽂이로 완성했어요. 가지도 직접 제가 길러 꽃이 피면 쓰곤 하죠. 호박, 복분자 같은 것들을 부모님 세대에서는 ‘왜 이런 걸로 꽃꽂이를 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저는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한국적인 재료들은 무궁무진한가요? 얼마 전 손수 빗자루를 만드는 이동균 명장님을 직접 찾아뵙고, 가을에 전시를 열기 위해 준비 중이에요. 국내에 마지막으로 남은 빗자루 장인인데,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가장 더울 때 억센 갈대를 채취해 빗자루를 만든다고 해요. 꽃꽂이를 하며 써보고 반해서 무작정 찾아갔죠. 이렇듯 다양한 작가들과 협업하며 꽃과 히스토리가 담긴 오브제를 함께 공유하고 싶어요. ‘꽃놀이’도 많은 분과 즐기고 싶고요.

“꽃과 꽃 사이 바람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둬요. 아무리 예뻐도 위화감을 주는 작업은 선호하지 않아요.”

가지, 여주 잎, 연밥, 복분자 같은 계절마다 나는 토속적 소재를 즐기는 신선아의 어레인지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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