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은의 타이밍

살다 보면 누구나 한번쯤 인생의 판을 뒤집고 싶어질 때가 있다.
MBC 간판 아나운서 자리를 13년간 지켰던 손정은이 지금 딱 그렇다.

클래식한 브레스트 버튼 재킷과 랩 디테일의 팬츠,시어한 소재의 터틀넥 톱은 모두 아모멘토, 키튼 힐 롱부츠는 코스, 이어링과 링은 모두 먼데이에디션.

 

평상시라면 선뜻 입지 않을 것 같은 과감한 실루엣의 옷들을 들춰 보며 그녀가 말했다. “옷이 너무 근사한데요! 빨리 입고 싶어요. 요즘 제 인생의 화두가 ‘도전’이거든요!” 작년 파란색 슈트를 입고 MBC 뉴스데스크를 끝낸 손 정은은 연극 <미저리>를 통해 연기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길해연, 김상중, 김성령, 안재욱 등 묵직한 배우들 틈에서 시골 보안관인 버스터 역을 강단 있게 해내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 우연한 기회에 드라마 <더 뱅커>에 출연한 뒤 그녀의 일상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게 바뀌고 있다. 마냥 뉴스가 좋아 아나운서를 꿈꿨던 20대의 어느 때처럼, 이제 막 마흔 문턱에 선 그녀는 연기라는 새로운 산에 오르기 위해 다시 숨을 고르고 있다.

연극 <미저리> 공연과 회사 생활을 병행하느라 더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 같다.
7월부터 9월까지 서울 공연을 할 때는 정말 바빴다. 평소처럼 방송, 라디오, 숙직까지 다 하고 저녁과 주말을 이용해 공연장으로 갔으니까. 지금은 부산과 광주 공연만 남아 스케줄은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다. 올봄에 제작진과 첫 미팅을 하고 서울 공연을 끝낸 가을까지는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다. 올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정말 많았고, 아주 오랫동안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데뷔를 했다.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을 텐데.
관객석에서 보는 무대와 무대에서 바라보는 관객석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무대에 서는 일은 당연히 떨리고 걱정스러웠다. 첫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실에서의 긴장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 심장 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들리 고, 머릿속으로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무대에서 미끄러지면 어떡하지, 연기하다가 발음을 실수하면 어떡하지, 관객과 눈이 마주쳐서 대사를 몽땅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났다. 다행히 막상 무대에 서는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 한 번은 대사 한 문장을 통째로 날렸는데, 상대 배우들이 워낙 베테랑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잘 받아주셨다. 그리고 생각 보다 내가 무대 위에서 뻔뻔하더라. 스스로도 놀랄 만큼! 하하. 속으로 ‘뭐지, 나 무대 체질인가?’ 하면서 살짝 들뜬 적도 있다. 물론, 아직도 대기실에 있으면 긴장하지만 말이다.

방송국에서는 13년 차 베테랑 아나운서인데, 다시 ‘신입’이 된 기분은 어땠나?
신입이라는 말도 과분할 정도다. 난 말 그대로 ‘초짜’다. 우연히 이재진 PD의 제안을 받아 <더 뱅커>에 짧게 출연했고, 그때 상대역으로 만난 김상중 선배님 덕분에 연극까지 하게 됐다. 무방비 상태에서 뛰어들었기 때문에 무조건 배우는 자세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 잠깐 연기 학원에 다니긴 했지만, 학원에서 배운 것과 촬영장, 무대 위에서의 연기는 전혀 다르더라. 20~30년 동안 연기를 해온 배우들 앞에서 내가 10년 넘게 뉴스를 진행한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 자체도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타입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나 타이틀에 얽매였다면 애초에 연기를 하지 않았겠지. 오히려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생겼다는 게 훨씬 더 기뻤다.

김상중 씨가 연극을 권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도 궁금해서 여쭤본 적이 있다. ‘날 왜 추천하셨냐’고. <더 뱅커> 촬영 당시 내 분량을 촬영하기 전 사전답사차 촬영장에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줄곧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만 진행했다. 예능 프로그램도 입사 초기에 몇 번 나간 이후로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최근에 연극 홍보차 <라디오스타>에 나간 게 처음이다. 그래서 뉴스와 시사 방송에만 익숙하다. 그 날의 뉴스를 전하면 다음 날 새로운 뉴스를 전하는 게 일상이었고, 두 번 촬영이 없다. 그런데 드라마는 같은 장면을 각도를 바꿔가며 찍고 또 찍는다. 그게 어떤 메커니즘인지 궁금하고 알고 싶었다. 궁금한 건 또 못 참는 성격이라 아 예 촬영장에 간 거다. “촬영 전인데 미리 공부하러 왔어요” 하니 그게 생소하면서도 좋아 보이셨던 모양이다. 또 리허설 때 김상중 선배님에게 연기 좀 봐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30분간 원 포인트 레슨을 받고 다음 날 지적해준 사항을 다 고쳐서 현장에 갔다. 첫 촬영 영상을 보면서 “연기를 처음 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네”라고 하시더라. 그 말 한마디에 아이처럼 기뻤다.

연기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나?
전혀. 드라마에 출연하기 전까지 배우나 연기하는 모습을 꿈꿔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와는 전혀 다른 영역,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끔 연기자들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동경하긴 했지만, 그 일을 내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상중 선배님이 ‘정은 씨, 보안관 역할 해볼 생각 없어요?’ 하셨을 때 이상하게 바로 ‘이건 해야 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지만, 그보다는 ‘잘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훨씬 컸다.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이 열리고, 강렬하게 끌렸다. 그래서 고민도 하지않고 ‘하겠다’고 한 거다.

연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이 궁금하다.
뉴스 진행할 때나 분위기 잡지, 평소에는 아주 밝은 편이다. 잘 웃고, 수다떠는 것도 좋아한다. 지인들은 내가 뉴스 할 때와 아닐 때가 정말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연극을 한다고 말했을 때 많이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냥 어디서 뭐 또 하나보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내가 “세종문화회관으로 와” 하니까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기를 한다고?!” 하면서 놀라더라. 하하. 내가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 국장님이 내 고민과 생각을 쭉 들으시더니 흔쾌히 OK를 해주셨다. 부장님도 마찬가지로 적극 지지해주셨다. 그래서 늘 고마워하고 있다.

지금껏 내 것을 지키려고 아등바등한 적은 없었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 길을 가겠다. 손정은은 그걸 원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선명해졌다. 올해가 딱 그 타이밍이다. 지금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심플한 노 칼라 재킷은 자라, 자카드 소재의 뷔스티에는 앤아더스토리즈, 부츠 컷 슬랙스는 로우클래식, 실버 토 포인트의 스틸레토는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 주얼리는 모두 먼데이에디션.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덥썩 받아들일 만큼 연기에 매력을 느꼈나?
연기 자체도 매우 흥미로웠지만, 스스로 정체기라고 느끼고 있던 터였다. 지난해 뉴스데스크를 끝내면서 ‘이제 시사나 뉴스는 하고 싶지 않다’고 선언했다. 아나운서라는 일에는 여전히 애정이 크다. 하지만 사실 방송인으로서는 몇 년 전부터 고민이 많았다. 20대 때는 앵커가 정말 멋있어 보였고, 입사 후 뉴스를 하면서 만족감도 컸다. 13년 동안 모든 시간대의 뉴스를 다 진행해봤다. 커리어 면에서는 아쉬움이 없지만 연차가 쌓이다 보니 정해진 틀안에서 관성적으로 돌아가는 생활이 조금 답답하다고 느껴졌다. 그 감정이 최근 2~3년 사이에 꽤 구체적으로 확장되더라. 아나운서로서 난 앞으로 어떤 방송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이었다. 그러던 차에 몇 번의 우연이 겹치면서 연기라는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요즘 하고 있는 고민들을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면?
대단한 고민이 아니라 10년 차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게 되는 ‘나의 미래’ 같은 거랄까. 나뿐만 아니라 많은 아나운서가 하는 고민이다. 미디어 환경이 달라지면서 채널이 많아지고, 아나운서들의 인지도가 예전만 못하다. 뉴스를 진행하는 데 인지도가 꼭 필요하지는 않더라도 어찌 됐든 크게 보면 방송인이라는 범주에서 인지도는 개인의 성취감에 영향을 끼친다. 긍정적으로 쌓은 인지도는 뉴스의 신뢰도도 높인다. 회사에서도 전과 달리 아나운서 개개인이 브랜드가 되라고 한다. 다행히 현재 국장님은 개인의 욕 구, 목표를 인정하고 적극 지지해주시는 분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영역에 상관없이 도전해보라고 격려해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 생활을 하면서 드라마도 찍고, 연극도 할 수 있었던 거다. 보도국 사람들은 물론 옆 팀 직원들도 공연을 보러 정말 많이 와주셨다. 정말 고마웠다. 제 모습을 보고 후배들이 “오늘 선배 보고 자극 많이 받았어요, 감사해요”라고 말하더라. 요즘 나의 큰 관심사는 이런 것들이다. 지금까지 익숙하게 잘해왔던 것 말고,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목표를 찾는 것, 그리고 달라진 방송 환경에 나만의 방식으로 잘 안착하는 것. 그게 하나는 연기고, 또 하나 생각한 것은 유튜브다.

연기나 유튜브 말고 꽂혀 있는 것이 있다면?
거의 매일 빼놓지 않는 것은 운동이다. 회사 지하 1층에 피트니스 센터가 있는데, 단 20분이라도 매일 가서 운동을 한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잠깐 내려가서 20분만 달리고 와도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운동한 지는 4년 정도 됐다. 임신하고 체중이 23kg이나 늘었는데, 출산 후에도 안 빠지더라.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가 두 돌 됐을 무렵 복직을 앞두고 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다. 매일 두 시간씩 운동하고 삼시 세끼를 닭가슴살 샐러드만 먹었다. 그렇게 꼬박 두 달을 했더니 몸의 라인이 달라졌다. 운동을 하고나면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도 맑아지고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의 비결이 있다면?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건 ‘2분의 법칙’이다. 어떤 일을 습관으로 만들고 싶다면 하루에 단 2분만 그 일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매일 한 시간 운동하기’가 목표인 사람 은 30분을 운동해도 ‘실패한 사람’이 된다. 그럼 그 좌절감 때문에 운동을 안 하게 되고, 하루 이틀 거르다 보면 ‘안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요즘 2분을 투자해 ‘좋은 습관 들이기’를 실천하고 있다. 그게 운동, 책 읽기, 글쓰기, 감사 기도다. 인터뷰 하러 오는 길에 택시 안에서 책을 잠깐 읽고, 아까 낮에 SNS에 짧은 글도 올렸다. 감사 기도는 마음 속으로 하는 거니까 생각날 때마다 하고 있다. 집에 돌아가서 운동만 하면 난 오늘 하루도 약속을 아주 잘 지킨,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이 된다. 3주째 하고 있는데, 이 짧은 순간에서 얻는 성취감이 생각보다 굉장히 크다. 요즘 내 인생의 큰 활력소다. 이 습관들이 매일 조금씩 쌓이면 10년 뒤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된다.

20~30년 동안 연기를 해온 배우들 앞에서 내가 10년 넘게 뉴스를 진행한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 자체도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타입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나 타이틀에 얽매였다면 애초에 연기를 하지 않았겠지. 오히려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 생겼다는 게 훨씬 더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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