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지는 오늘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윤지의 지금, 그리고 여섯 살 라니와의 행복한 한때를 카메라에 담았다.

어느 날 문득 라니를 보면서 깨달았다. 발가벗고 이 세상에 온 아주 작은 아이가 하루하루 눈부시게 커가는데,
그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도 내게 주어진 큰 축복이라는 것을.

화이트 블라우스는 렉토 RECTO

“한때는 출산과 육아로 인해 삶이 잠깐 멈췄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라니야말로 현재의 내 삶을 자각하게 하는 가장 뚜렷한 지표더라고요.” 이윤지는 예의 그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작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몸집에도 큰 산처럼 품이 넓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데 이윤지는 후자다. 늘 자신이 있어야 할 좌표를 정확히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잠깐의 휴식기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지금처럼 삶을 선명하게 오롯이 느끼며 산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어느 때보다 솔직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선 그녀에게 그 사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물었다.

올해 여섯 살이 된 라니에게는 몇 시간 동안 진행하는 화보 촬영이 꽤 피곤했을 것 같다. 그런데도 놀랍게 한 번도 칭얼대지를 않더라.
나도 조금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마쳤다. 사진도 정말 마음에 든다(웃음). 참 신기한 게,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라니는 꾸미고 예쁜 옷 입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오늘처럼 기회가 주어질 때나 드레스업을 하지 평소에는 정말 평범하게 다닌다. 그런 걸 보면 여자아이의 성향이라는 게 진짜 있나 싶다. 딸을 키우는 즐거움을 요즘 새삼 실감하고 있다.

현장에서도 그렇고, 최근 출연을 시작한 <동상이몽 2 – 너는 내 운명>의 방송에서도 그렇고, 라니와 최대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다. 요즘 가장 자주 나누는 대화의 화제는 무엇인가?
오늘 계산해보니 ‘라돌(배 속에 있는 둘째의 태명)’이의 출산 예정일이 딱 90일이 남았더라. 지금까지는 내 세상을 온통 라니가 채우고 있었는데, 몇 달 뒤에는 라돌이가 그 틈에 속수무책으로 들어오겠지. 엄마로서는 무척 기대되고 설레지만 라니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직 잘 모르겠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첫째가 느끼는 상실감에 대해 들은 얘기가 많아서 요즘은 라니와 동생과 관련한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한다. 진짜 이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배 속의 동생과 나를 챙겨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고 고맙다.

어떨 때 그런 걸 느꼈나?
얼마 전에 라니랑 같이 카페에 갔을 때 주문하려고 일행과 함께 줄을 서 있는데 라니가 갑자기 “엄마 이리 와” 하면서 나를 잡아끌더라. 주문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도 억지로 끌고 가더니 의자를 빼서 앉히고는 “왜 (힘들게) 줄을 서 있어. 엄마는 여기 앉아서 기다려” 하더라. 서 있으면 엄마와 동생이 힘들까 봐 제 딴에는 마음이 쓰인 거다. 그때 정말 감동받았다. 굳이 동생이 아니더라도 요즘 라니는 하루가 다르게 큰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쑥쑥 자란다. 생각도, 말도, 행동도 내가 깜짝 놀랄 정도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참 이상하고 복잡하다. 라니가 태어나기 전에는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리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 말에 숨은 아쉬움과 안타까움, 간절함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가끔 라니가 옆에 있는데도 네 살 무렵 라니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찾아보곤 한다(웃음). 그걸 깨닫고 나서 동생이 태어나기 전의 여섯 살 라니, 남편과 함께한 내 모습을 더 많이 담아두고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가족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을 결심한 이유도 그래서인가?
맞다. 나 혼자라면 고민 없이 흔쾌히 출연했을 텐데 가족, 특히 아이와 함께 방송을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 남편(정한울 씨는 세 살 연상의 치과의사다)의 염려가 컸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는 성격이라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워하더라. 그래서 말해줬다. “어쨌든 내가 연예인인 이상 남들의 시선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워. 그런 걸 원했다면 결혼 상대를 잘못 고른 거야”(웃음). 사실 나도 남편의 고민에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주 흔치 않은 귀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지금의 우리 모습을 기록해주는 것이잖은가. 그에 따른 결과도 결국 우리 몫이지만, 아직까지는 아주 즐겁고 재미있다.

지금까지는 내 세상을 온통 라니가 채우고 있었는데,
몇 달 뒤에는 라돌이가 그 틈에 속수무책으로 들어오겠지. 엄마로서 무척 기대되고 설렌다.

방송 후 반응이 아주 좋다. 하나같이 “친숙하고 진솔한 모습이 좋다”고 말한다. 수줍음이 많다는 남편의 다정하고 반전 있는 모습에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나는 카메라에 익숙하지만, 남편은 아직도 영 어색해한다. 쉽지 않지만 많이 애써주는 걸 알기에 무척 고맙다. 격주 주말마다 촬영하는데, 촬영하는 날에는 집 안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웃음).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미안하기도 하고 사실 조금 재미있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방송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올해로 7년 차다. 남편은 일하는 날에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야 들어올 정도로 정말 바쁘게 지낸다. 나도 몇 년 동안 라니 키우고 틈틈이 작품도 하면서 바쁘게 보냈다. 그러다 보니 둘이 차분하게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하더라도 거의 아이 얘기뿐이다. 방송에서 말했다시피 우리가 결혼 전 알고 지낸 세월은 10년이지만, 이렇다 할 연애를 한 건 불과 몇 달 안 된다. 갑자기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의 프러포즈나 다름없는 고백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고 그러고 나서 몇 달 만에 결혼했으니까(웃음). 그래서 우리 둘 얘기만 놓고 보면 그때의 얘기가 어딘가 엉성하게 짜인 느낌이다. 알콩달콩한 연애를 거의 못한 데 대한 아쉬움도 컸고. 그런데 방송이라는 명목으로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갖고 대화할 기회가 생긴 거다. 요즘 잠깐잠깐 연애하던 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첫 만남에 “왠지 이 남자는 나중에 좋은 남편이 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실제로도 그런가?
남편은 육아를 포함한 집안일에 대해 전적으로 내 의견과 판단을 따르는 편이다. 내가 남편에게 고마운 건, 많은 남편이 “너한테 다 맡길게”라고 말은 하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나는 빠질게”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남편은 내가 결정하고 분담한 일을 굉장히 성실하게 잘 따라준다는 거다. 바쁘다는 핑계로 육아나 집안일을 나한테 던져버린 게 아니라 내가 결정한 것에 대해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참여하려고 노력한다. 또 하나 장점은,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다. 솔직히 할 일을 알아서 척척 하는 편은 못 된다. 직업상 물리적인 시간의 한계도 있고. 하지만 최소한 내가 도움을 요청하거나 부탁한 일은 거의 완벽하게 수행하는 편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해서 그런가(웃음)? 뭐든 잘 배우고 익히는 습관이 실생활에서도 꽤 유용하게 적용되는 케이스다. 하하.

나는 아주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내 일상, 아이와의 추억을 공유하는 게 편하고 좋을 뿐이다.

방송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 속 모습만 봐도 ‘꾸밈없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솔직한 매력이 있다. 그런 모습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 같다.
방송이 나간 뒤 “성격뿐 아니라 집도 인간적이다”라는 반응도 있었다. 그 얘기를 듣고 순간 “욕이야, 칭찬이야?” 했다(웃음). 방송을 본 지인은 “집도 좀 정리하고 찍지 그랬어” 하더라. 그래서 “그거 나 엄청 정리한 거야!” 그랬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다 알 거다. 깨끗이 청소해도 10분을 안 간다. 그 모습이 그냥 내 일상의 한 부분이니까 그대로 보여준 거다. 사실 털털하다는 것과 솔직하다는 게 같은 의미는 아니지 않나. 만약 내가 예쁘게 꾸미고 가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그런 모습을 보여줬을 거다. 그게 나니까. 하지만 나는 아주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내 일상, 아이와의 추억을 공유하는 게 편하고 좋을 뿐이다.

엄마에게 육아는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인데, 이상하게 아이를 키우는 동안은 가끔 내 삶이 잠깐 멈췄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일 때가 있다. 배우로서의 고민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당연히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결혼과 동시에 배우로서의 기회를 많이 잃는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환경 자체가 그랬다. 특히 여배우에게는 더 가혹했던 것이 사실이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결혼 자체가 배우 커리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출산과 육아는 확실히 다르더라. 일단 여자는 물리적으로 체형이 변한다. 10개월 동안 배가 서서히 불러오고, 아무리 용을 써도 아이가 6개월 만에 걸어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엄마로서 감내해야 하는 물리적 시간이 있으니 조바심이 나더라. 한참 굴러가던 바퀴가 갑자기 멈춘 느낌이랄까?

그런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극복했나.
어느 날 문득 훅 커가는 라니를 보면서 깨달았다. 발가벗고 세상에 온 아주 작은 아이가 하루하루 눈부시게 커가는데, 그 모습을 아주 가까이에서 온전히 볼 수 있다는 것도 내게 주어진 큰 축복이라는 것을. 내 바퀴가 아예 멈춘 게 아니라 전과는 다른 스테이지에서 또 다른 바퀴를 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쉬고 있는 한쪽 바퀴가 여전히 생각나고 간절한 건 마찬가지다. 다만 예전처럼 다시는 그곳으로 못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은 이제 없다. 난 감정, 생각, 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연기하는 배우다. 아이를 통해 분명 전과는 다른 감정의 폭이 생겼고, 이걸 배우로서 잘 쓰는 날이 올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까 예전에는 내 단점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조금 다르게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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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 이를테면 어떤 것이 있나?
눈이 선명해서인지 내 이목구비를 잘 보면 어딘가 만화같이 생겼다(웃음). 예전에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소위 ‘요즘 먹히는 얼굴’이 아니니까. 그래서 한때 ‘눈이 좀 작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하. 하지만 지금은 이 이미지로 연기할 수 있는 작품, 배역을 찾아서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나한테 꼭 맞는 역할을 찾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쉼 없이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배우로서 요즘 나의 고민이자 숙제다.

일단 올해의 가장 큰 숙제는 라돌이의 건강한 출산이 아닐까?
맞다(웃음). 라니 때는 육아가 처음이라 생소하고 낯설고 어렵고, 그래서 힘들었다. 감정적으로 날이 서 있었던 적도 많고. 그런데 둘째는 좀 여유가 생겼다. 아이의 성장 과정을 한 번 겪고 나니 막연한 불안감은 확실히 덜하다. 라니와 터울이 있어서 그나마 조금 수월할 것 같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있고.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걸 알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다. 라니는 좀 더 씩씩하고 용감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 어릴 때는 사랑이 넘치는 아이가 되기를 바랐는데, 사랑은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쳐서 과할 정도다. 라니가 더 커서 자기만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됐을 때 의연하고 씩씩하게 크고 작은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많은 대화를 나눠야겠지. 그때의 나와 라니 그리고 우리 가족이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하고 기대된다.

나한테 꼭 맞는 역할을 찾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쉼 없이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배우로서 요즘 나의 고민이자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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