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트롯

아무리 전략과 예측이 무의미한 시대라지만, 트롯이 이렇게 뜰 줄은 몰랐다. ‘가인이어라’에 이어 ‘영웅시대’를 만들며 트롯 열풍을 이끌어낸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서혜진 PD를 만났다.

수백만 명이 지켜본 경연의 열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오디션 프로그램 사상 최초로 우승자 발표 연기라는 극적인 드라마까지 더해지며,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은 종합편성채널 예능 프로그램의 성공사에 한 획을 그었다. 최고 시청률은 35.7%. 종편은 물론, 지상파에서도 10년 넘게 기록하지 못한 수치다. 마지막 결선에 오른 트롯 가수 7인은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이라는 한계가 무색하게 방송가를 종횡무진하며, 그야말로 ‘꽃길’을 걷고 있다. 2018년 SBS에서 TV조선으로 이적해 <미스트롯>에 이어 <미스터트롯>까지 성공시키며 대박 행진을 이어오고 있는 서혜진 PD의 자축은 여기까지. “하고 싶은 프로그램 다 만들 수 있어서 너무 좋다”며 다시 워밍업을 시작했다.

35.7%라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예상은 했나?
대부분의 PD가 그렇듯, 우리는 결과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방송과 동시에 시청률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보기 때문이다. 요즘은 워낙 매체가 다양해서 시청률의 의미가 예전만큼 크지는 않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기록한 시청률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시청률이 혹독한 점은 받아 드는 그 순간뿐이라는 거다. 그와 상관없이 우리는 다음 방송을 만들어야 하고, 또 평가를 받는다. 이런 루틴을 20년 넘게 매주 반복해오다 보니 시청률에 크게 취하지 않게 됐다. 어느 순간이 되니 주변의 기대가 생각 이상으로 크다고 느껴졌고, ‘매주 기록을 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지금은 그 목표를 이뤘다는 것이 기쁘다.

최종 결선에 오른 7인과 마지막 방송 후 어떤 인사를 나눴나?
서로 ‘고맙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 것 같다. 사실은 우리가 출연진에게 훨씬 더 고마웠다. 경연을 치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베테랑 가수여도 매주 미션을 치르는 건 자신을 마지막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면서 한계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 체력은 물론, 감정적으로도 혹사당한다. 매 순간 최고의 퍼포먼스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 있었다. PD로서는 그런 노력을 흡족한 결과로 돌려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생방송 문자 투표에서 결국 당일에 집계하지 못하고 발표가 미뤄졌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 아닌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웃음). 집계가 늦어질 때도 결과가 아예 안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업체에서도 기존 서버로 충분히 처리가 가능하다고 했고. 당일 늦어질 때도 “데이터 처리가 늦어지는 원인을 찾아 다시 큰 서버에 넣어서 집계할 테니 안심하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결국 “오늘 밤 안으로 안 될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 마지막 회에서 영광과 고통이 함께 찾아온 거지. 순발력 있고 차분한 진행으로 끝까지 마무리해준 김성주 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정말 진땀을 뺐다.

그런 상황이 오히려 <미스터트롯>의 극적인 드라마를 완성해 준 것 같다.
그렇게 봐주신다면 다행이지만, 그 우승 발표 하나만을 보고 3개월 동안 전력 질주한 사람으로서는 정말 뼈아픈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콜 수는 예상했는데, 그토록 다양한 문자가 쏟아지리라고는 예측을 못 했다. <미스터트롯>의 주 시청자층은 특수 기호 누르고 자기가 응원하는 가수 번호만 써서 보내는 문자 투표에 익숙하지 않다. 나중에 보니까 집계에 유효하지 않은 문자가 너무 많았다더라. 총 775만 건의 문자 투표 중에 200만 건이 ‘사표’로 처리됐다. 아쉬우면서도 고마웠다. 프로세스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쇼에 참여하고 싶은 시청자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젊은 층의 호응도도 높았다.
재미있는 것이, 결국 ‘사표’ 처리된 문자들을 젊은 층이 밈(Meme)으로 소비하더라. ‘우리 엄마가 <미스터트롯> 문자 투표에 실패한 이유’ 같은 제목의 ‘짤’과 함께 스토리를 만들내는 거다(웃음). 그렇게 세대 간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선순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 성공 후 많은 인사를 받았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축하가 있다면?
누군가 그러더라. <미스터트롯>을 보고 나서는 다른 가요 프로그램은 흥이 떨어져서 못 보겠다고. 공연형 쇼로서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는 자부심이 있다. 일단 무대를 본 분들은 정말로 즐거워했으니까. 트롯 고유의 흥과 이를 잘 살린 참가자들의 뛰어난 가창력, 완성도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수십 명의 제작진이 밤낮없이 참가자들을 관리하고 구성을 짰다. 그렇다 보니 프로그램 전체의 텐션이 끝까지 잘 유지됐다.

시청자로서는 ‘오디션’이라는 포맷이 자칫 뻔해 보일 수 있다. <미스터트롯>만의 강점은 무엇이었나?
정해진 방송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무대를 보여주려고 했다. 시청자는 사실 참가자들의 노래, 무대를 보기 위해 방송을 본다. 편집도 빠르게 하고, 참가자 인터뷰나 마스터 평가도 꼭 필요한 부분들만 살리고 부수적인 것들을 최대한 들어냈다. 필요할 때는 템포를 늦추되, 기본은 완성도 있는 무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그래야 흥이 안 떨어지고 쭉 흡인력 있게 갈 수 있으니까. 그런 점들이 주효했던 것 같다.

전작인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의 차이점이 있다면?
<미스트롯>은 TV조선에 와서 처음 오디션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솔직히 말하면 <미스트롯>은 대단한 걸 의도했다거나 치밀하게 구성을 짜서 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렇게 해볼까?’ 하고 지른 것이 예상치 못하게 큰 반응을 얻은 것이다. 거대한 흐름에 얼떨결에 밀려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첫아이를 키우는 심정이랄까?(웃음). 처음 육아를 하면 이게 맞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어느새 아이가 커 있지 않나. 딱 그 심정이었다. 다만 가능성은 충분히 확인했다. <미스터트롯>은 신청자만 1만5000명에 달했고 그중에서 101명을 선발해 방송을 시작했다. 한 차례 경험을 통해 ‘선수’들을 선발하는 제작진의 눈도 날카로워졌고, 결과적으로 무대도 훨씬 풍성해졌다.

트롯계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다. 실제로 최후의 7인은 90년대생이 대부분이더라.
정확한 지적이다. 개인적으로 뿌듯한 부분이기도 하다. 단순히 ‘과거 트롯의 영광을 재현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트롯의 명맥을 이을 다음 세대를 발굴했다는 점이 <미스터트롯>의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싶다. 90년대 중반 이후 트롯계는, 특히 남자 가수의 경우 ‘허리’가 없다. 여자 트롯 가수는 그나마 장윤정이 연결고리가 되었는데, 남자 가수는 박현빈 정도다. 물론 훌륭한 가수지만, 장윤정의 후배 가수 이미지가 있어서 남자 트롯 가수의 명맥을 잇는 걸출한 차세대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았는데, <미스터트롯>을 통해 임영웅이라는 대표 가수가 등장한 것이다. 그의 팬덤을 보고 나도 너무 놀랐다. 결승전에 오른 일곱 사람 중 영탁과 장민호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은 모두 1990년 이후에 태어났다. 심지어 정동원은 2007년생이다(웃음).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TV조선이 <미스터트롯>으로 개국 이후 처음 흑자를 기록했다고 들었다.
정확한 금액은 모르지만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다(웃음). 전적으로 나를 믿고 지원해준 회사에 늘 고마웠는데, 이렇게나마 나름의 보답을 한 것 같아서 뿌듯하다. ‘회사에서 입지 좀 좋아졌겠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그런 건 없다. SBS에서 처음 이적해 올 때부터 입지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하하.

2년 전 TV조선으로 회사를 옮긴 뒤 <아내의 맛> <연애의 맛> <미스트롯> <미스터트롯>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방송국을 대표하는 PD가 됐다.
해마다 공개되는 스타 PD들의 연봉 랭킹에 올해 이름을 올릴 것 같은데?

연봉이야 많이 받으면 좋지(웃음). 직장인에게 연봉은 자존심이니까, 내 자존심이 상할 만큼만 아니면 된다는 주의다. 하지만 정작 이직한 이유는 연봉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마음껏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SBS는 규모가 크고 견고한 조직이다. 그건 아주 큰 장점이지만, 나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때로 족쇄가 되기도 한다. 거쳐야 하는 합의 과정도 너무 길고 복잡하다. 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종편은 보다 자유로운 환경이다. 게다가 오디션 포맷은 준비부터 과정까지 훨씬 더 많은 인력과 비용이 들어가는데도 주저하지 않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줬다. 또 하나 고마운 건, 우리 작가들이다. 실력이 최고인 작가 팀이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했다. <미스터트롯>의 성공에는 작가들의 노력이 절반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스터트롯> 이후 방영 중인 <사랑의 콜센터>의 인기도 심상치 않다. 벌써 시청률이 20%를 넘었더라. 요즘은 ‘미스터트롯 7인방이면 다 된다’는 말이 있다.
보통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끝나면 재방송으로 편성을 내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스터트롯>은 경연 중 보여준 퍼포먼스들이 아까워서 이를 모아 갈라쇼 형태로 무대를 만들어보자고 계획했다. 그러다 코로나 때문에 방청객을 모을 수 없게 되고, 토크쇼 형태로 구성이 바뀌었다. 그렇게 토크쇼를 찍었는데, 방송이 너무 잘 나왔다(웃음). 2회 분량으로 만들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기획한 프로그램이 <사랑의 콜센터>다. 특집 방송으로 만들었는데 어쩌다 파일럿이 된 거지.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12편 정도로 쭉 가볼까 한다. 조만간 트롯 레전드와 함께 노래를 배우는 ‘노래 교실’ 콘셉트의 리얼리티 예능 <뽕숭아학당>도 시작한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의 성공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굳이 의미를 찾자면, PD로서 나를 대표할 만한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었다는 정도 아닐까? PD라면 누구나 자신을 상징하는 프로그램 하나쯤은 갖고 싶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난 운이 좋은 편이다. SBS에서 <스타킹>을 만들 때 정말 힘들었지만 버라이어티쇼의 정수를 체험할 수 있었다. <동상이몽>에서는 리얼리티 예능의 매력도 경험했다. <K-팝 스타> 초반에 잠깐 참여했는데, 그 경험이 <미스터트롯>의 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다. 결국 그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의 결실을 맺었다. 그러고 보니 과거는 그저 지나가기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미스터트롯>이 내게 남긴 것? ‘현실에 충실하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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