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진

어느 순간부터 멈춰 선 듯한 시간, 낯선 생활도 어느새 익숙한 일상으로 자리 잡은 6월의 어느 날. 윤혜진을 다시 만났다. 온몸으로 예술을 펼쳐 보이던 발레리나의 화려한 움직임은 여전히 유려하고 반짝였다. 지금은 디자이너 또는 누군가의 아내와 엄마로 더 자주 불리지만, 그녀의 바탕에는 발레리나로서의 삶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골드 버튼 디테일의 마린풍 화이트 팬츠는 ZARA 다이아몬드와 터콰이즈를 정교하게 세팅한 롱 네크리스는 TIFFANY & CO. 스트랩 샌들은 COACH 1941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1년 전에도 <스타일러 주부생활>과 화보 촬영 현장에서 만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오랜만에 만나서 나도 무척 반갑다(웃음). 비슷비슷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는데 벌써 1년이라니! 나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대부분은 아주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다. 삶의 중심에는 여전히 지온이와 남편이 있고, 내 브랜드의 옷을 디자인하고, 유튜브도 촬영하고, 또 틈나는 대로 SNS도 열심히 하고 있다.

지온이와 함께 촬영한 건 오랜만이지 않나? 엄마 옆에 서니 제법 친구 같은 느낌이더라.
난 지온이와 함께 촬영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행히 지온이도 촬영을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다. 이번에도 슬쩍 “엄마랑 같이 사진 촬영할래?” 물으니 단박에 “좋다”고 하더라. 아빠가 수시로 사진을 찍어주기 때문일까.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다. 아이랑 같이 촬영하다 보면 아무래도 아이 컨디션이 많은 영향을 끼쳐서 더 피곤하긴 한데, 그래도 멋진 사진을 남길 수 있어서 좋다.

지온이가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됐다. 엄마들은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또 한 번 크게 생활 패턴이 바뀌지 않나?
개학을 하긴 했는데 아직은 온라인 수업 위주라 생활 패턴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정해진 날에만 등교를 하는데, 학교가 집에서 꽤 멀어서 남편 수고가 늘었다. 한 시간 넘게 가서 몇 시간 있다 또 픽업해야 하니 그사이를 활용해 아예 근처에서 운동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다 온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엔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세 식구가 거의 집에 붙어 있다. 저녁때쯤 되면 “엄마 놀아줘” 하는 지온이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정도다(웃음). 얼른 이 사태가 끝났으면 좋겠다.

아이가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가방을 메고 들어가는 뒷모습이 그렇게 찡하다고들 하던데, 어땠나?
감수성이 예민한 남편과 달리 상대적으로 나는 감정적인 편은 아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니 이런 성향도 조금은 달라지더라. 특히 아이와 관련된 일이나 뉴스에 전보다 훨씬 민감하다. 얼마 전에도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 첫 등교 얘기가 나왔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제 지온이가 초등학교 가면 우리 없이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내게는 아직 어린 아이인데 몇 년 더 있으면 내 품을 떠나겠구나 싶더라. 내가 스무 살도 되기 전 발레하겠다고 한국을 떠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막상 처음 등교하는 날은 의외로 쿨했다(웃음). 지온이가 씩씩하게 “엄마, 아빠 다녀올게” 하고 들어가기에 나도 얼떨결에 “응, 잘 다녀와!” 하고 들여보냈다. 아이들이 때로는 어른들보다 의연할 때가 있다.

지온이가 다 컸구나 싶을 때는?
자신만의 논리를 갖춰서 말할 때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그러다 어떤 때는 “엄마 괜찮아, 내가 다 이해해” 하면서 오히려 날 안아주고 보듬어주기도 한다. 기특하고 대견하고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아쉽다. ‘언제 이렇게 컸지?’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지온이와 대화하면서 위안 받는 일이 많이 늘었다. 그리고 아이가 클수록 엄마로서 새로운 고민들도 생긴다.

이를 테면 어떤 고민들인가?
작게는 아이의 성장 발달부터 크게는 아이의 미래까지 다양하다. 지온이가 또래에 비해 키도, 체중도 큰 편이다. 너무 잘 커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받았다. 먹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인데 당장 식단 조절을 해야 하니 그것부터 만만치 않다. 탄수화물 섭취량을 줄이라고 해서 곤약밥을 만들어줬는데, 심지어 그것마저 잘 먹는다. 하하. 또 초등학교에 가니 교육에 대해 아무래도 전보다는 더 신경이 쓰인다. 지금까지는 강제로 뭔가를 시키기보다 아이가 원할 때,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학교에 가보니 아이들의 편차가 너무 심하고, 그게 지온이에게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다른 친구들은 다 잘하는데 자기만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어느 정도 선에서 가이드를 잡아주는 게 좋은 건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이의 반응에 따라 자유롭게 풀어두는 게 더 나은 건지 잘 모르겠다. 내 일에는 과감한 편인데, 지온이랑 관련된 일이면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걱정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양가죽 소재의 슬리브리스 톱은 & OTHER STORIES 포켓 디테일의 와이드 팬츠는 COS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라운드 이어링과 알파벳 T 모티프의 로즈 골드 브레이슬릿은 모두 TIFFANY & CO. 위빙 디테일의 머스터드 컬러 뮬은 H&M.

어떤 때는 “엄마 괜찮아, 내가 다 이해해” 하면서 오히려 날 안아주고 보듬어주기도 한다.
기특하고 대견하고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아쉽다. ‘언제 이렇게 컸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온이와 대화하면서 위안받는 일이 많이 늘었다.

오늘 촬영장에서도 엄태웅 씨가 모녀의 사진과 영상을 끊임없이 찍던데, 누군가가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유심히 바라봐주는 그런 관심은 지온이만의 특별한 경험일 거 같다.
남편은 우리 가족의 매 순간, 매 장면을 기록한다. 원래부터 카메라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지온이가 커가는 모습을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계셔서 부정에 대한 그리움도 조금 있는 것 같고, 어릴 때 사진이 많이 없는 게 개인적으로는 아쉬웠나 보더라. 우리 둘을 찍느라 정작 본인 사진은 별로 없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참 미안하더라. 이 사진 바깥에서 늘 우리와 함께 있었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위안을 삼는다. 조만간 나도 근사하게 남편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

유튜브 채널 ‘What see TV’를 보면 8년 차 부부의 솔직함이 담겨 있다. 신혼 때와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나?
대부분은 크게 달라진 점 없이 그대로다. 감성적인 남편의 성향이나 그에 비해 오히려 무던한 나도 그대로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결혼 초반에는 서로 다르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똑같이 맞추기 위해 강하게 부딪치고 깎고 날을 세웠다면, 이제는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것?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나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가족에 대한 헌신이나 사랑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지온의 컷아웃 디테일과 퍼프소매가 특징인 블루 원피스와 레더 플랫 샌들은 모두 ZARA

서로를 ‘남사친’ ‘여사친’으로 칭하며 상황극을 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긴장감이 풀어진 부부들에게 그 나름의 비법이겠다 싶던데?
하하. 그랬나? 내 유튜브 영상을 매번 남편이 촬영해주는데, 사실 몇 달 동안 집 밖에 나가기가 힘들어서 콘텐츠를 만드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보면 몇 달 동안 집밥 레시피만 숱하게 찍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영상을 찍다 보니 조금 지루하더라. 그래서 즉흥적으로 내가 먼저 ‘남사친’ 상황극을 설정해서 남편한테 툭 던졌는데, 이분이 또 배우인지라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치더라(웃음). 다들 부부끼리만 통하는 코드나 장난이 있지 않나. 궁금하신 분들은 제 유튜브를 구독해서 볼 것을 추천한다!

몸에 있는 타투는 어떤 의미인가?
타투에 관심을 가진 건 20대 초반 유럽에서 발레를 하면서부터다. 몸에 타투를 한 외국 무용수들이 정말 많았다. 춤출 때 살짝살짝 보이는 것들이 멋있어 보였다. 물론 클래식 쪽은 아니고 대부분 현대무용가들이었지만 나도 언젠가 그렇게 몸에 타투를 새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한국에서는 줄곧 클래식 발레단에서 무용을 했기 때문에 잊고 살다가 결혼하고 지온이를 낳은 뒤에 새겼다. 지온이 이름, 내 생년월일, 내가 운영하는 브랜드 로고 같은 것들이다. 발목 쪽에는 작게 토슈즈를 그려 넣었다. 안 보이는 것까지 다 합해서 10개쯤 될 것 같다. 대부분 발레리나에서 디자이너가 된 내 삶 그리고 가족의 히스토리와 연관된 것들이다. 오랫동안 생각했던 문구와 그림들이라 고민 없이 한꺼번에 다 새겼다. 생각해보니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기점에서 내 삶을 한번 정리해보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때까지 내 삶을 규정했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중요한 우선순위들을 새겼으니 말이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새긴 것이라 후회도 없고, 더 보태고 싶은 마음도 없다.

레드 & 옐로 컬러 라이닝이 특징인 크레이프 소재의 와이드 셔츠와 팬츠는 모두 MULBERRY 알파벳 T 모티프의 볼드한 로즈 골드 링은 모두 TIFFANY & CO.

타투는 지온이를 낳은 뒤에 새겼다.
지온이 이름, 내 생년월일, 내가 운영하는 브랜드 로고 같은 것들이다. 발목 쪽에는 작게 토슈즈도 그려 넣었다.
이전까지 내 삶을 규정했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 중요한 우선순위들을 새겨 넣은 셈이다.

당신이 만들어온 습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부지런함. 가만있지 못하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한다. 부지런함도 타고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글쎄. 또 하나는 하기로 마음먹으면 앞뒤 재지 않고 그냥 한다는 것이다. 1년 전쯤 시작한 유튜브도 일주일에 영상을 하나씩 꼬박꼬박 올리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구독자들과 약속했으니 그냥 하는 거다. 본업이 아니니까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서 하는 면도 있고. 가끔 몸이 피곤하긴 한데, 내가 가진 여러 성향 중 이런 면들은 꽤 마음에 든다. 지온이도 닮았으면 좋겠다 할 만큼(웃음).

반대로, 지온이가 닮지 않았으면 하는 면은?
과도한 책임감. 책임감이라는 말이 언뜻 들으면 좋은 것 같지만 너무 심하면 약간 강박적인 성향으로 나타난다. 엄마와 아내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최대한 완벽하게 수행하려고 애쓰다 보니 가끔은 몸이 너무 피곤하다. 뭐든 내 손으로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남한테 일도 잘 못 맡긴다.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직원도 한두 명 두면 훨씬 편했을 텐데, 그걸 못해서 내 몸을 혹사시키고 있다. 덩달아 남편까지 동원되기도 하고(웃음).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느긋해져도 되는데 그걸 못해서 나와 주변이 고생하는구나 싶을 때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타협이 잘 안 된다.

리넨 소재의 레몬 컬러 테일러드 재킷은 STUDIO TOMBOY

곧 지온이 생일이라고 들었다. 어떤 선물을 준비했나?
유관순 열사를 그린 커스텀 케이크와 갈비찜을 준비 중이다. 요즘 지온이가 유관순 열사에게 제대로 꽂혔다. 유관순 열사의 전기부터 생애를 다룬 영상, 각종 자료를 있는 대로 다 찾아보고 수시로 유관순 열사 얘기를 한다. 지온이에게는 지금 거의 아이돌 급이다(웃음). 한창 호기심을 느낄 때 보여주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참인데도 마스크를 꽁꽁 쓰고 천안에 있는 유관순 생가에 다녀왔다. 생일 선물로 유관순 열사 피규어를 갖고 싶다고 했는데, 아무리 뒤져도 피규어는 없더라. 인터넷에 그렇게 많은 캐릭터 피규어가 있는데 도대체 왜 유관순 열사는 없는 걸까? 케이크로 겨우 마음을 달래긴 했는데, 피규어가 아니라 크림으로 그려진 유관순 열사를 보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갈비찜은 지온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데, 핏물 빼는 것부터 만드는 과정이 제법 복잡하다. 그래서 생일날만 해주는 특별식이다(웃음).

올해로 마흔한 살이 됐다. 지금 이 나이의 특권은 무엇일까?
난 지금의 내가 너무 좋다. 40이라는 숫자 자체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꼽으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발레에만 몰두했던 20~30대일 수도 있지. 그때는 풋풋함이 있었고 내 일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할 수 있는 한 전력을 다 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다 안다고 잠깐 착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더라. 발레가 아니면 안 될 줄 알았는데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꿈도 생겼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도 생겼다. 뭘 좀 아는 40대가 여자로서는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인 시기라고 생각한다. 아마 쉰 살이 되어도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아마도 나는 나만의 즐거움을 또 열심히 찾아서 즐기고 있을 것 같다. 스스로에게 그 정도의 믿음은 있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꼽으라면 아무것도 모른 채 발레에만 몰두했던
시절일 수도 있다. 그때는 풋풋했고 일에 대한 열정도 대단해서 할 수 있는 한 전력을 다했으니까. 그래서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다 안다고 잠깐 착각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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