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밖의 배우 서이숙

“넘치지 않게 나를 드러내는 삶”

능수능란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좋은 건,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 또한 상당한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배우 서이숙에게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그런 작품이었다. 누구 하나 빈틈없이 모두가 제 역할에 충실했던 극에서 빠져나와 그녀는 최근 큰 시상식 무대에 두 번이나 올랐다. 한 번은 시상자로, 한 번은 수상자로. 알맞은 긴장감과 이유 있는 여유로움으로 즐기고 있는 지금, 그녀를 무대 밖에서 만났다.

화이트 재킷과 와이드 팬츠는 모두 Zara. 블랙 톱은 Maison Marais. 주얼리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얼마 전 열린 ‘제56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극상 시상자로 무대에 섰다. 드라마보다는 연극 무대에 훨씬 오래 섰기 때문에 더 뜻깊었을 것 같은데.
시상식이 한 달 가까이 미뤄진 데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객석 쪽에 수상자들만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낯설고 웃픈 풍경을 직접 보니 사실 참석의 기쁨보다 아쉬움이 조금 더 컸다. 해외 시상식처럼 여유로운 파티 같은 분위기까지는 힘들더라도, 자유롭고 격의를 갖춘 멘트들이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많이 부족했는지 무대 뒤편에서 계속 들은 말이 “빨리빨리”였다(웃음). 시상자들은 준비된 멘트를 할 틈도 없이 거의 로봇처럼 대본만 읽다 내려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끝나고 나니 그게 많이 아쉽더라.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극 부분을 시상하는 것은 조금 낯선 풍경 같은데?
백상예술대상은 대중문화의 발전과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1960년대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원래 연극과 영화 분야를 대상으로 했다. 그러다 10년 전쯤부터 연극은 아예 시상 분야에서 제외됐다. 아무래도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산업 규모가 작고 보는 사람도 제한적이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연극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깨나 상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다 올해 10년 만에 연극도 다시 시상 분야에 포함된 거다.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연극 배우들이 늘면서 그 저력을 보여준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시상식에 대한 기대가 더 컸나 보다.

어떤 멘트를 준비했나?
연극배우들은 시상식에 참석할 기회가 많지 않아 그런 자리 자체를 어색해하고 낯설어한다. 2015년 KBS <착하지 않은 여자들>이라는 작품을 찍고 처음 연기대상에 초청돼서 갔는데, 분위기가 도대체 적응이 안 되더라. 괜히 겸연쩍은 마음이 들어서 보이는 배우마다 인사를 했는데, 나중에 사진을 보니 고개 숙이고 있는 사진밖에 없었다. 속으로는 엄청 긴장되고 어렵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여유로운 척해야 한다는 걸 경험을 통해 배운 거지(웃음). 이번 시상식에 온 후배 연극인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낯설고 어렵고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멘트를 준비했는데, 결국 하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개최된 ‘제30회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했다. 수많은 후보들 가운데서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서이숙’을 꼽았다고 들었다.
이해랑연극상은 연극인들에게 아주 의미가 큰 상이다. 일단 상금이 무려 7천만원이다! 하하. 무엇보다 그동안 수상자 내역을 보면 내가 그 자리에 이름을 올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면면이 화려하다. 운 좋게 기회가 닿아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내가 후배들을 위해 좀 비켜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주시는 것이니 겸허히 받고 내 몫을 해내야겠지.

드라마 <부부의 세계>도 큰 사랑을 받고, 올봄은 아주 특별하게 기억될 것 같은데?
<부부의 세계>는 잘되기도 잘됐지만, 현장에서 연기를 하면서 정말 즐거웠다. 같은 대사라도 내공이 단단한 배우와 주고받을 때의 에너지가 있다. 호흡과 공기가 리드미컬하게 흘러가는데, 그 느낌이 굉장히 짜릿하다. 요즘은 시청자 수준이 높아져서 보시는 분들도 배우들의 그런 연기를 즐긴다. 이른바 ‘연기구멍’이 하나도 없었다. 연출과 편집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고.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드라마 끝나고 거하게 뒤풀이도 했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웃음).

처음 대본에서는 한 장면만 등장하는 캐릭터였다고 하던데?
원래 특별출연으로 제안을 받아 지선우에게 상담 받는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감독님이 “여우회에서 어른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없는데 이숙 선배가 끝까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하게 된 거다.

1989년 극단 ‘미추’에 입단해 2003년 <허삼관 매혈기>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년에 2~3작품씩 하면서도 연극은 빼놓지 않고 거의 해마다 출연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내 경우에는 그게 연극인 것 같다. 연극은 몇 달 동안 계속 같은 장면, 같은 대사를 연습해 무대에서 최고의 정수를 보여준다. 뭐 하나에 집중하면 깊게 파고드는 성향 때문인지 연극을 하고 나면 몸은 피곤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완벽히 충전되는 느낌이 있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2011년 갑상샘암 진단을 받고 무대에 설 만큼 목 상태가 회복되지 않아 드라마로 눈을 돌렸다고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히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 ‘암’이라는 한 글자가 주는 위압감이 대단하더라. 황망하고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다행히 치료가 비교적 쉬운 편이라 회복은 했는데, 목 상태가 무대에 오를 만큼 금세 돌아오지는 않았다. 너무 빤한 얘기지만 건강한 몸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때 깨달았다. 가지고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몰랐다가 막상 빼앗기거나 없어지면 그 소중함을 알듯 당연한 인생의 진리를 몸소 체험한 거지.

꼭 지키는 인생의 철칙 같은 게 있다면?
넘치지 않게 살고 싶다. 연기를 할 때도 신들린 열연을 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자칫 과하면 작품 속 캐릭터가 아니라 열연을 하는 배우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내 연기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지, 관객과 시청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 또 아무리 까마득한 후배라도 쉽게 훈수를 두지 않는다. 직접 조언을 구해오면 모를까, 그건 명백히 그 연기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니까. 하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꼭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은 넘치지 않게 내 목소리를 내는 요령 정도는 터득한 것 같다(웃음). 꼭 배우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유와 방종 사이 어디쯤에 있을 적당한 경계를 고민하면서 내 테두리는 지키고 상대의 영역은 존중해줘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장점은 무엇인가?
이런 얘기를 직접 하는 건 너무 민망한데(웃음). 굳이 찾자면 정확한 발음? 많은 신체적 언어를 활용해 캐릭터의 상황과 생각, 감정을 전달하는 데 유용하다.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는 날 특징짓는 개성이기도 하지만, 아주 가끔은 목소리 때문에 내 연기가 한정적인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차갑고 매정한 악역 제안이 자주 들어오는 걸 보면 말이다(웃음). 그렇다고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는 아니다. 악역이 아닌 캐릭터도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으니까!

시어서커 소재의 노 칼라 재킷과 팬츠는 모두 LE917. 실버 이어링은 COS. 네크리스와 링,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요즘 몰두하고 있는 것이 있나.
‘잘 늙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길게 잡아서 80세까지 연기를 한다고 치면 앞으로 30년은 더 잘 지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신체가 건강해야 하고, 때에 따라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미혼이라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는데, 장점은 내 몫의 1인분의 삶만 잘 살면 된다는 것이고, 단점은 모든 고민과 선택을 혼자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만큼 내가 준비한 것들을 잘 보여주고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더 커진 것 같다. 튀지 않지만 존재감 있는 배우, 그게 지금의 내 목표다.

특별한 건강관리 비결 같은 게 있나.
예전에는 등산을 좋아했다. 지금 서울 강북 끝의 산자락 아래 살고 있는데, 그 동네가 너무 좋다. 이렇게 촬영이 있을 때 말고는 강남 쪽은 거의 올 일이 없다. 등산을 꾸준히 했는데도 몸이 늙어가는 것이 느껴져서 요즘은 PT를 받고 있다. 배우 김지호와도 친해서 자주 만나 수다 한판 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최근 <밥블레스유 2>에서 보여준 소탈하게 망가지는 모습에 의외라는 사람이 많더라.
원래 허례허식 따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장난기도 많다. 무표정한 얼굴과 웃는 얼굴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웃음).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전혀. 연기든 예능이든 하기로 한 이상 그 안에서 요구하는 것은 최선을 다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날 억지로 꾸며서 보여주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

지금 당장 일주일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무얼 하고 싶나?
일단 눈뜨자마자 함께 사는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집 근처 등산로를 산책할 것이다. 그리고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하루 이틀쯤은 금세 지나갈 거다. 그런 다음 연천에 계신 엄마에게 가야겠다. 올해 여든다섯 되셨는데, 고향에서 혼자 지내신다. 요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엄마를 뵙는 게 중요한 일과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면 무척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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