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시대의 교육

지금 교육혁명이 필요한 이유
너나 할 것 없이 뉴 노멀을 말하는 시대. 우리는 미래 사회에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까. 김누리 교수가 말하는 새로운 미래의 시작은 ‘교육혁명’에 있다.

코로나19로 촉발된 ‘팬데믹 패닉’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절대 신(神)으로 믿었던 기술과 과학과 시스템의 눈부신 진화가 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사회 각계는 포스트 코로나를 위한 뉴 노멀을 정의하느라 바쁘다.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이자 책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등을 쓴 김누리 교수는 그 와중에 ‘경쟁 교육 타파’ ‘입시와 대학 서열화 철폐’ 등을 앞세운 획기적인 교육개혁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사회적 과제라고 말한다. 이유가 뭘까.

사유하는 인간, 성찰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목표다.
깊이 사고하기 위해서는 모든 지식의 배후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런 비판 교육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든다.

여러 매체에서 우리나라의 교육개혁에 대해 쓴소리를 하셨죠. 왜 하필 교육인가요?
획일화된 경쟁 교육의 단점과 폐해 정도로만 설명하기엔 교육 시스템의 문제가 너무 크고 명확하고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사회 각층에서 일어나고 있는 충격적인 사건들도 교실 붕괴의 한 결과라고 봅니다. 성숙한 인간이 지녀야 할 당연한 인식과 태도가 결여돼 있음은 물론 잔혹성, 폭력성, 냉정한 물질주의로 점철돼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일관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조차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삶을 성숙하게 돌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화에 실패한 개인의 일탈로 보기에는 문제 자체가 우리 의식 속에 내면화되고 구조화되어 있어요. 교육이 하나의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총체적인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제 겸허하게 ‘교육의 실패’를 인정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교육제도와 사회문제는 어떤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나요?
극단의 경쟁적 교육 시스템은 청소년 시기를 너무도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경쟁이 아주 어릴 때부터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어요. 지식을 습득하고 평가하는 형태부터 살펴볼까요? 혹시 선다형 방식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아나요? 바로 미국 국방부예요. 문맹률이 높고 교육 수준이 낮은 미국에서 신병을 모집하기 위해 처음 등장한 방식이죠. 아주 단순한 지식을 물음으로써 효율적으로 사람을 분류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에요. 그걸 우리는 가장 보편적인 학습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체로도 모욕적이고 불쾌하다고 생각해요. 이처럼 단순한 선다형 질문으로 등수를 매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제에 끊임없이 함정을 파고, 어떻게 해서든 틀리게 만들어야 합니다. 십수 년간 이렇게 학습하고 교육받은 아이들의 심성 구조는 왜곡될 수밖에 없어요. 열패감, 열등감, 피해의식, 자격지심, 낮은 자존감, 불행의식, 우월감, 우울감, 보상심리 같은 부정적인 인식을 깊이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지금 같은 줄 세우기식 경쟁 교육 시스템 아래에서는 올바른 성인으로 성장하기 힘들다는 것이 제 생각이에요.

학생들의 재능과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도입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이군요.
교육과 입시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여러 번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제도를 개선하면 기득권층이 가장 먼저 선도적으로 거기에 적응해서 우위를 점해 왔어요. 그러면서 교육은 다시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죠. 학생부종합평가라는 명목 하에 수많은 편법과 꼼수가 등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개선’만으로는 교육개혁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선다형 다음으로 즐겨 쓰는 방식 중 하나가 단순 단답형 문제예요. 주로 독재자들이 쓰는 방식이죠. ‘A는 B다’를 계속 주입해서 암기하도록 하고 다른 의견을 말하면 ‘틀렸다’고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나치즘 교육이 딱 이것과 닮았어요.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가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라고 말한 이유예요. 우리는 아이들의 우열을 나누고, 줄을 세우고, 우수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을 지배하고 더 많이 누리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교육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앞세워 철저한 물질만능주의, 소비주의, 결과주의, 무한경쟁, 권력욕 같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마치 인간의 본능인 것처럼, 사회 발전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처럼 호도합니다. 평가 방식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에요. 그러니 그 방법을 아예 없애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 수밖에 없어요.

입시가 가장 투명하고 정당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경쟁하지 않으면 교육이 하향 평준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고요.
유럽의 학생들은 독일의 아비투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등 졸업 자격 시험만 통과하면 비교적 자유롭게 대학에 갈 수 있고, 대학 간 서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지식 수준과 교육의 질이 하향 평준화됐나요? 우리가 말하는 교육의 질은 총 점수를 학생 수로 나눈 평균 점수예요. 모든 과목을 두루 잘하고, 전체 평균이 몇 점 이상이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또 모든 과목을 다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갑니다. 반면 그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탐색하고 찾아서 그에 맞는 진로를 정하고 대학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해요.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이미 그 분야에 대해 웬만한 전문가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죠. 그런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대학교수들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단편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산술적 통계로 예를 들어볼까요? 지난 30년 간 노벨상 수상자 수만 비교해도 유럽과 우리나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한국의 대다수 아이들이 10대 시절을 거의 헌납하다시피 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이런 격차는 왜 나타나는 걸까요? 한국과 교육 시스템이 비교적 비슷한 미국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미국에서 들여온 것이지만 경쟁은 더 심화됐어요. 선다형 문제는 답을 몰라도 맞힐 수 있는 확률이 20%예요. 이게 진짜 교육일까요? 그렇게 얻은 점수를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간판’을 따기 위한 공부는 이제 그만할 때가 됐어요.

그렇다면 교수님이 말하는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요?
‘사유하는 인간’ ‘성찰하는 인간’을 길러내야 합니다. 흔히 어떤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의 심연이 있다’고 하잖아요. 내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들요. 깊이 성찰하기 위해서는 모든 지식의 배후에 질문을 던져야 해요. 독일 교육을 예로 들면,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비판 교육’입니다. ‘이 내용 중에 틀린 것은?’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주장이 있다, 이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하라’고 말합니다. 히틀러라는 독재자가 자행한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과거로 인해 생긴 독일 교육의 독특한 면모라고 할 수 있어요. 누군가의 주장과 이론에 끊임없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죠. 이러한 비판 교육은 모든 아이가 자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키워요. 이를테면 한국은 소비는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고 이것이 국가 경제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경제 상식처럼요. 그런데 유럽 아이들은 이런 주장을 들으면 ‘소비가 진짜 기업의 성장과 국가 발전을 이끌어내는가?’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그에 반하는 주장과 논리를 펴죠. 그들에게 소비는 발전의 원동력이 아니라 ‘생태계를 파괴해서 22세기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확실하고 불합리한 행동’이에요. 사치성 소비는 그들에게는 거의 죄악입니다. 소비할 때 죄책감을 느끼는 아이들이 82%예요. 소비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른 거예요.

스웨덴의 17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그런 배경에서 등장했군요. 코로나19로 인해 견고했던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소위 ‘툰베리 세대’의 충격도 큰 것 같습니다.
환경문제만큼은 우리나라가 세계 흐름에서 한참 뒤떨어져 있어요. 우리처럼 기술과 과학을 기반으로 인류가 영원히 진보하고 역사가 발전할 것이라는 맹목적인 낙관론이 지배하는 사회는 없습니다. 정말 특이한 점이에요. 유럽에서는 ‘환경 위기로 인해 22세기가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인식이 상식 수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거든요. 문제 인식 정도가 아니라 지금 상태로라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게 거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어요. 그래서 독일은 1970년대부터 10대들이 아마존을 살려내고, 정치적인 탄압을 받는 사람을 석방하라는 목소리를 냈어요. 그들이 지금의 50~60대가 된 거예요. 어릴 때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주장을 말하고, 비판 사고가 일상화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에요. 그에 비하면 오히려 툰베리는 한참 뒤에 나온 셈이죠.

양육자의 변화도 필연적이겠군요.
우리 아이들을 세계 시민으로서의 윤리의식을 지닌 성인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점수로 평가하는 무한 경쟁을 없애고, 소비중심주의적인 자본주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해요. 자녀를 위해 지금이라도 환경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유럽의 녹색당 출범을 주도한 세력은 교사와 여성들이었어요. 가장 가까이에서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고 돌보는 이들이죠. 생태적 상상력을 발휘해 생활에서 실천하는 수밖에 없어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서 환경 관련 법안들이 조속히 입법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불안이나 두려움을 없애는 건 결국 행동’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68혁명 때 등장한 세력 중 하나가 ‘상황주의자(Situationist)’들이에요. 이들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유토피아를 꿈꾸지 말고 살아라.’ 지금 앉은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당장 실천하는 거예요.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몰지 말고, 마음껏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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