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키트 미식

‘이 정도면’ 하고 타협하던 맛, 넘치는 포장 쓰레기, 바로 데워 먹는 간편식보다 귀찮은 조리 과정.
그간 밀키트의 장점이 와닿지 않았다면, 새롭게 즐기는 방법을 제시하는 이들을 주목해볼 것.

환경을 생각하는 밀키트
푸브먼트

포장재를 양산해내는 밀키트에 대해 고민하던 김지원 대표, 사직동 주반과 압구정 이타카의 김태윤 오너셰프, KBS1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 취재 작가 경험을 살려 국내 곳곳의 식재료를 탐구하는 장민영 기획자가 새로운 식문화를 정립하자는 공통된 생각으로 푸브먼트를 론칭했다. 이들은 비건 어묵을 활용해 시중에 볼 수 없던 비건을 위한 떡볶이를 만드는가 하면 병아리콩 대신 아주까리밤콩 같은 토종 콩으로 후무스를 만들기도 한다. 거기에 음식을 담는 비닐과 박스까지 생분해되는 소재를 사용하는 등 밀키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눈길을 끈다.

왼쪽부터 장민영 기획자, 김지원 대표, 김태윤 이사

그전에는 볼 수 없던 메뉴라서 흥미롭네요.
김태윤 론칭 전에 밀키트를 80종류 넘게 먹어봤는데 겹치는 메뉴가 많더라고요. 어떤 제품이 인기다 싶으면 경쟁적으로 비슷한 메뉴를 만들어내는 데다 인건비, 재료비를 낮추는 구조가 훤히 보였죠.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 다양한 레시피를 선보이기 위해 ‘계절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고유의 식재료를 담은 밀키트를 고안했어요. 네 개의 카테고리, 다섯 가지 메뉴예요. 먼저 로컬 라인에서는 고추지릉장 냉국수나 토종콩 후무스처럼 토종 식재료와 사라져가는 레시피를 소개해봤어요. 밀키트 본연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가볍게 접근하는 집밥 라인으로는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내놓았고요. 또 컬래버레이션 라인의 레스토랑 메뉴에는 푸브먼트만의 가치를 더해 변주하려고 해요. 이를테면 주반의 시그너처 메뉴인 탄탄면 팬더스 누들에 동물복지 돼지고기를 사용한다거나 우리밀로 만든 쫄면을 넣는 등 식당을 운영할 때는 엄두 내지 못한 재료를 써보는 거죠. 특히 비건 밀키트는 푸브먼트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소 메뉴예요. 그전에는 비건을 위한 밀키트가 없었으니까요.

밀키트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김지원 팬데믹 시대가 도래하면서 떠오른 식문화가 배달 음식과 간편식이잖아요. 집에서 요리를 도맡아 하다 보니 재료의 영양소와 맛은 살리면서도 쉽게 한 상 차려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밀키트라는 확신이 들었죠.
장민영 무엇보다 요리하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 음식 재료의 낭비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밀키트의 장점이에요. 저는 수년간 김태윤 셰프와 함께 알려지지 않는 농가나 로컬 식재료를 소개하는 세미나, 워크숍 등의 행사를 꾸준히 개최해왔어요. 그런 행사를 통해 했던 이야기들을 밀키트에 담았다고 보시면 돼요. 지인들이 늘 궁금해하는 것이 식재료를 언제, 어디서 사느냐였어요. 그런데 이제 밀키트 안에 요리로 구현해 담을 수 있게 된 거죠. 남해의 선장이 잡는 멸치, 장독대에서 퍼온 간장 등 좋은 로컬 식재료를 하나하나 더 자세히 설명하고 공유할 계획입니다.

천연 밀짚을 사용해 100% 생분해되는 도시락 용기

100% 생분해되는 비닐 같은 에코 패키지가 남달라 보여요.
김태윤 제품을 구매하면 포장 쓰레기도 소비자의 몫이 되는데, 생산자로서 그 문제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배송 박스, 아이스팩 등은 종이 재질을 사용했는데, 소스와 면의 비닐포장은 대체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흙 속에서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100% 생분해 비닐을 생각해냈는데, 국내 기업에서 상용화한 사례가 없었어요. 처음 생분해 비닐 공장을 찾아갔을 때 최소 생산량이 10만 개라는 말에 깜짝 놀랐죠. 하지만 생분해 비닐만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대표님과 협의해서 강행하게 되었어요.
장민영 벌써부터 어디서 패키지를 제작했느냐는 문의가 들어오고 있어요. 주변에선 대기업이 우리를 따라 할 거라고 우려하기도 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좋은 식재료 문화와 친환경적 패키지를 더 널리 퍼뜨리는 게 우리의 목표인 만큼 걱정 안 해요.

기존 제품들과 비교해보면 내용물이 큼직큼직해요.
김태윤 패키징을 제외하고는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대기업의 밀키트는 대부분 자동화 설비를 거치니 건더기 같은 게 작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저희는 자신의 손으로 칼질을 한 번이라도 하며 요리하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채소도 크게 잘라 밀봉했어요.

비건 어묵, 유기농 쌀과 우리 콩이 들어간 춘장으로 만든 짜장떡볶이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김지원 든든한 두 기획자와 함께 좋은 작물을 길러내는 생산자들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팸투어나 환경 정화 활동 같은 것을 기획 중이죠. 같이 쓰레기를 줍고 음식을 나눠 먹고 하는…. 무엇보다 푸브먼트(food+movement)라는 우리 이름에 걸맞게 음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활동을 모색하려 합니다.

 


로컬 식당에서 시작하는 밀키트 생활
폴베리

지난 9월, 합정동 골목에 리틀 이탈리아 같은 곳이 문을 열었다. 폴베리는 소노, 세이페찌 등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운영해온 김니노 셰프가 연 테이크아웃 전문 식당이자 밀키트와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식료품점이다. 기업이 셰프와 협업해 만든 셰프 밀키트는 이미 시중에 많이 나와 있지만, 셰프가 날마다 뽑는 생면과 새로 만든 소스를 밀키트 형태로 배달받거나 직접 들러서 구매할 수 있는 곳은 드문 만큼 기대가 크다.

올리브유, 발사믹 비네거에서부터 밀가루, 달걀, 버터, 치즈까지 셰프의 시크릿일 수도 있는 재료를 판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파스타, 피자 등은 이미 우리에게 일상적인 음식이 되었고, 파인다이닝에는 수준 높은 이탈리아 음식을 만드는 셰프들이 즐비해요. 그런데 이와 달리 우리나라 마트에 나와 있는 식재료는 여전히 한정적이죠. 그래서 수입사를 찾아 조금씩 큐레이션을 해서 선보이게 되었죠. 주로 제가 유학 생활을 해서 익숙한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역의 재료로 꾸렸어요.

식당을 탈피한 테이크아웃과 밀키트 전문점이라고 봐도 되겠네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이제 더 이상 음식을 준비해두고 손님이 오기만 기다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만든 음식이 테이블에 놓이게 하려면 셰프로서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했죠. 요즘 사람들의 행동반경이 자기가 사는 동네를 넘어서는 일이 줄어들고 있잖아요. 그래서 동네에 집중해보자는 데 생각이 미쳤죠. 특히 합정은 동네 자체가 공동체 문화, 공동 육아가 자리 잡혀 있다 보니 식재료의 원산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요. 게다가 1~2인 가구도 많으니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죠.

셰프가 직접 만든 생토마토케첩과 생면,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버터와 프로슈토. 파스타소스는 시즌별로 변주를 줄 예정이다. 왼쪽부터 트러플감자소스와 애호박바질페스토, 볼로네제소스.

폴베리의 음식에는 채소 소믈리에로서의 노하우도 담겨 있을 것 같아요.
밀키트는 간편식의 일종이지만 여기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고, 그 재료는 또 어디에서 생산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먹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요. 그래서 식재료를 구입하는 손님들에게 더 자세히 설명해드리려고 애쓰죠. 이를테면 생면을 만들 때 사용하는 달걀은 자연 방목한 닭이 낳았는데, 유기농 넘버도 함께 알려드려요. 또 버섯 같은 채소는 작은 농가를 찾아가 직접 구해 오는데, 손님들과 그 구입처도 공유해요.

대표적인 메뉴를 소개한다면?
진짜 이탈리아 음식의 맛은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자연스러운 맛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현지 레시피에 가장 가깝게 만들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어 볼로네제에 들어가는 햄과 고기는 스팸의 모티프가 되기도 한 이탈리아 전통 햄 모르타델라를 꼭 넣고 현지 살라미를 곁들이는 식이죠. 또 일반적인 바질페스토는 밀키트로 만들면 시간이 지나면서 점층적으로 올리브 오일이 분리되죠. 우리는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제철 채소에 애호박의 비중을 높여 고소하고 따뜻하게 즐길 수 있도록 레시피를 개발했어요.

밀키트를 더욱 맛있게 즐기는 방법을 조언해준다면?
간단히 소스를 데우고 면을 삶기만 하면 되지만, 각자의 방식에 따라 다른 맛으로 즐길 수 있는 게 밀키트의 매력이에요. 보통 소스는 중불에 3분 정도 데우고 생면은 끓는 물에 1~2분쯤 익히라고 권해요. 하지만 더 오래 졸여 짙은 농도로 즐길 수도 있죠. 또 페스토에 견과류 등을 곁들여 고소하게 즐겨보세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의 젓갈처럼 염장해서 먹는 소스나 치즈와 곁들이는 이탈리아식 소스 ‘꾸냐’를 소개할 예정이에요. 지금 세대는 과거와는 달리 ‘한 끼를 대충 때운다’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건강한 식재료로 요리하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경험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해요. 폴베리는 이 세대에게 이탈리아 요리와 바른 식재료를 알려주는 가이드 같은 매장이 되고 싶습니다.

 

 

Editor 안서경
Photographer 정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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