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정, 홍콩의 나날들

홍콩살이 12년 차에 접어든 방송인 강수정은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생겼다. 힘을 빼는 내공도 생겼다.
욕심은 잠시 내려둔 채 흘러가는 상황에 자신을 맡겨보려 한다. 좀 더 가볍고 솔직하게.

“홍콩 명소 타이퀀(Tai Kwun)에서 만날까요?”
몇 달 전 바다와 가까운 리펄스 베이로 이사를 한 강수정은 2008년 처음 홍콩에 와 살던 동네를 떠올리며 약속 장소를 정했다. 타이퀀은 1800년대 후반에 세워진 중앙 경찰서, 중앙 관공서, 빅토리아 교도소 등이 모여 있던 곳으로, 2018년 건물 형태만 살린 채 레스토랑, 바, 갤러리 등이 모인 문화 복합 공간으로 탈바꿈한 홍콩의 랜드 마크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 19 이후 달라진 홍콩 모습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됐다. 한산한 거리, 휴점 상태에 들어간 갤러리와 숍들, 저녁 6시가 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현재 레스토랑은 밤 10시까지 운영한다). 홍콩에서 10년 이상 산 강수정도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그렇게 한적해진 도시에서 강수정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도시의 정취를 조금씩,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특유의 반달 눈웃음은 여전하네요.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단박에 알아봤어요.
‘강수정표 눈웃음’이 있죠. 악수도 못하고 마스크를 항상 써야 하니 반가운 느낌을 표현할 길이 없더라고요. 눈빛으로 마음을 전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타이퀀에 자주 오나요? 코로나 19 확산 이후 홍콩 거리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발코니가 있는 2층 베트남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스위스 건축가 헤르조그 & 드뫼롱이 디자인한 제이시 컨템퍼러리 갤러리에 자주 들렀어요. 2008년 결혼을 하고 이 동네에 신혼살림을 꾸렸거든요. 타이퀀 주변으로 레스토랑, 바, 갤러리 등 각종 상업 시설이 몰려 있어서 관광객도 많았죠. 그러다 얼마 전 홍콩아일랜드섬 남서쪽 해변가에 있는 리펄스 베이로 집을 옮겼어요. 리펄스 베이는 상업 지구인 미드 레벨과 달리 화려한 가게도, 높은 빌딩도 없는 여유로운 동네예요. 덕분에 코로나 19 스트레스도 덜 하고요. 그래도 활기찬 홍콩의 모습을 생각하면 타이퀀이 먼저 떠올라요. 홍콩의 역사를 품은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죠.

광둥어로 ‘큰 집’을 의미하는 타이퀀은 원래 ‘센트럴 경찰서’였다. 높은 벽돌 담장이 감싸고 있던 감옥은 10년의 레노베이션을 거쳐 컨템포러리 아트 갤러리와 공연장이 어우러진 홍콩의 랜드마크로 재탄생했다.

코로나19 가져다준 삶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자발적 백수가 된 거요.(웃음) 정기적으로 한국을 오가며 방송 일을 했는데, 양국 격리 기간 때문에 더 이상 힘들어졌어요. 현재 홍콩은 입국 시 21일간 자가 격리를 해야 해요. 작년 12월 한국에서 일을 마치고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호텔에 왔는데 자가 격리를 하면서 심리적으로 힘들더라고요. 가족과 한 달 이상 떨어져 있을 때도 그런 감정을 못느꼈는데, 눈앞에 두고도 못 만난다는 게 힘들었죠. 가족과 삼시세끼를 먹는 일이 뜨고 지는 해처럼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된 거예요.

먼 거리를 오갈 정도로 일에 대한 포부가 남달랐는데 많이 아쉽겠어요.
맞아요. 칠전팔기로 KBS 아나운서에 합격했을 만큼 방송인은 제 꿈이었고, 2014년 어렵게 가진 아이를 출산하고 5년 만에 복귀했으니 일에 대한 욕심이 클 수밖에요. 저에게 일은 열정의 동의어에요. 안 하고는 못 배길 정도로 즐겁죠. 스스로 재능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상황이 허락한다면 나이 들 때까지 방송 일을 하고 싶어요. 빨리 가는 것보다 어떻게 가는 가가 중요하죠.

요즘 홍콩의 일상은 어떤가요?
저의 본격적인 홍콩 생활은 이제부터라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그동안 한국을 꾸준히 오갔기 때문에 이렇게 홍콩 생활에 ‘올인’하면서 사는 것이 처음이거든요. 아들 학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는 플레이데이트도, 외국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과 함께 집에서 요리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일도 신선하고 재미있어요. 외국 친구들은 ‘방송인 강수정’을 몰라요. 그저 털털하고 넉살 좋은 ‘사이먼(제민이 영어 이름) 맘’으로 알고 있죠. 오늘은 아이들과 어떤 테마로 놀까, 어떤 음식을 차릴까,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등 방송에서 쌓은 ‘예능감’을 나름 발휘하고 있어요. 하하. 마치 흥미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기분이랄까. 집에 머물면서 삶은 단순해졌지만 매 순간이 새로워진 건 긍정적인 변화 같아요.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을 다시 바라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죠. 홍콩살이를 시작하면서 다잡은 마음가짐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어떤 마음가짐이요? 대충 사는 것. ‘아님 말고~’라는 유연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모든 삶이 그렇지만 해외 생활은 더욱더 느닷없이 다가오는 일이 많아요. 몸으로 부딪히는 것이 답이 될 때가 많죠. 적당히 포기하고 힘을 빼고 살아야 해요. 일이 꼬이면 꼬이는 대로 놔두고요. 과정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목숨 걸지 않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어려운 일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허우적대지 않고 헤엄칠 수 있어요.

마음이 답답할 때는 홍콩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피크에 가요. 짧은 산길이 있는데 걷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아니면 이렇게 볕 좋은
노천카페에서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 자체가 위로가 돼요. 이처럼 잠깐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곳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홍콩에서 일상의 위로나 용기를 얻기 위한 홍콩의 프라이빗 스폿을 꼽는다면요?
마음이 답답할 때는 홍콩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피크에 가요. 짧은 산길이 있는데 걷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요. 제민이가 갓난아이였을 때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피크 트램을 타고 산꼭대기 올라가 휴식도 취하고 카페에 들러 해가 질 때까지 책을 읽었어요. 늘 가방에 이북을 넣고 다니는데, 신간 코너를 한 번 훑어보고 관심 가는 책이 있으면 일단 다운을 받아요. 그렇게 책을 보관함에 잔뜩 쌓아놓고 동시다발적으로 읽죠. 아니면 이렇게 볕 좋은 노천카페에서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 자체가 위로가 돼요. 요즘은 더 자주 잠깐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곳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soojingi_kang)을 보니 특히 맛집을 많이 다니는 것 같던데, 홍콩 맛집을 몇 군데 추천해 준다면요? 당장 갈 수는 없지만 나중에 꼭 한 번 가봐야 하는 곳이요.
딤섬부터 시작해볼까요? 어떤 메뉴라도 100% 성공할 수 있는 곳은 딤섬 브런치로 유명한 골든리프(Golden Leaf)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렁킹힌(Lung King Heen)이에요. 하도 많이 가서 레스토랑 스태프 모두 아이 성장 과정을 지켜봤을 정도죠.(웃음) 피자는 모토리노(Motorino), 케이크가 먹고 싶을 때는 코바 1817(Cova 1817). 우리나라로 따지면 분식점이라 할 수 있는 차찬탱(茶餐廳)에 들러서 연유를 듬뿍 얹은 홍콩식 프렌치토스트, 두툼한 버터를 끼워 넣은 파인애플번과 밀크티를 먹어보세요. 포크찹라이스도 무척 좋아해요. 돼지고기커틀릿, 볶음밥, 토마소소스가 함께 나오는데, 우리가 잘 아는 그 맛이겠거니 생각하지만 한 입 먹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이죠. 홍콩은 정말 미식 천국이에요. ‘이게 과연 맛있을까?’싶은 것도 먹어보면 진짜 맛있어요.

아이 등교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르는 차찬텡. 따뜻한 밀크티와 샌드위치로 잠깐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꼬리곰탕, 소꼬리찜, 녹두빈대떡 등 요리도 수준급이죠? 코로나 집밥 레시피 하나 공개해주세요!
녹두전 만드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깐 녹두를 반나절 이상 불려둡니다. 믹서기에 녹두와 불린 쌀 3스푼, 약간의 물을 함께 넣고 가는 것이 포인트예요. 입자가 부드럽게 씹히는 정도로만 갈아주세요. 그런 다음 부침가루, 생강, 후추, 마늘로 밑간한 돼지고기와 숙주, 대파를 넉넉하게 넣어요. 여기에 푹 익은 묵은지까지 총총 썰어 넣어서 부치면 더 맛있어요.

집밥으로 평범한 일상을 재발견하고 있군요.
삼시세끼는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지만 순간으로 따지면 매일 바뀌는 장면이죠. 음식을 매개로 가족들이 단란하게 식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시간이 제일 좋아요.

건강 관리, 자기 관리 비법도 궁금해요.
원래 운동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일주일에 네 번씩 1시간 정도 빠르게 걷는 것이 전부인데, 홍콩은 도심이든 해변가든 걷기에 좋아서 도움이 돼요. 나름 간헐적 단식을 하는데, 아침과 점심은 충분히 먹고 저녁은 삶은 고구마 한 개나 채소 위주로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9시에 아이를 재우고 일찍 자는 편이라 가능한 것 같아요.

오늘 인터뷰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가장 자주 들은 것 같아요. 인생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6살짜리 사내아이를 키우다 보면 하루를 사건 없이 무탈하게 보내는 것 자체가 감사해요.(웃음) 흠…. 인생 전체를 통틀어 굳이 하나를 꼽는다면 아나운서에 합격한 일이에요. 제 꿈이 실현되었으니까요.

매일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면요?
오늘 잘 살았니?

홍콩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하나 꼽는다면요?
2008년 3월 15일, 홍콩에서 치른 결혼식. 인생 2막의 시작이었죠.

요즘 홍콩은
인터뷰를 진행한 1월까지만 해도 강력한 거리두기 정책이 시행된 홍콩은 현재 하루 확진자 수가 10명 아래로 뚝 떨어지며 집합 제한 조치가 많이 완화된 상태다.
식당은 밤 10시까지 열고, 실내외 짐도 영업을 재개했다.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입장 가능하지만 오션파크와 디즈니도 문을 열었다고. 활기를 되찾고 있는 홍콩에서 그녀도 건강하고 열심히 일상을 보내고 있다.

Writer 계안나 Photographer Rory, Chu Tin 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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