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영의 하루

이혜영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모든 일상은 그녀의 작품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시 드레스와 시폰 케이프는 모두 OCT 31 양가죽 소재 슬라이드는 YUUL YIE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혜영을 위한 문장이 아닐까. 특유의 천진난만하고 쾌활한 오라를 지닌 이혜영은 지금까지
개인 전시를 네 번 열었고, 현재도 다음 전시를 위해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쉴 새 없이 바빴던 과거에서 벗어나 여유 있게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현재를 열렬히 사랑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반려견 부부리와 함께 하는 산책 외에는 거의 밖에 나가지 않죠. 평소에는 그림 작업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항상 키우면서 지내고 있어요. 우선 딸을 키우고 있고, 정원을 돌보며 식물도 키우고, 부부리도 키우고 있네요.

팬데믹이 일상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죠.
아무래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어요. 예전보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겼고요. 안 지 오래되었지만 자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물론, 조금 불편한 관계였던 사람들에게도 안부를 묻고 만나기도 해요. 지금이야말로 지난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재정립할 기회인 것 같아요. 바쁘고 분주하게 지낼 때와는 또 다르게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도 하고요. 본의 아니게 마주한 여유로운 시간이 어쩌면 다행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랜만에 화보 촬영을 했어요.
화보 촬영은 수도 없이 해봐서 부담이 없는데, 이번 촬영 레퍼런스를 받고 저를 화가처럼 보여주려고 스태프들이 애쓴 것이 느껴져서 무척 고마웠고요. 그리고 국내 디자이너들의 옷이 많이 준비되어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그들도 모두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이 옷들을 잘 표현해야 할 텐데’라는 부담감도 생기더라고요.

도트 프린트 볼륨 드레스는 SON JUNG WAN 화이트 펌프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렸을 때는 미래만 바라봤는데, 지금은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땐 정말 즐거웠는지, 슬펐는지 지나온 모든 시간들을 찬찬히 되새기고 있어요. 아름답게 표현되면 좋잖아요.”

패션에 대한 남다른 애정도 빼놓을 수 없죠.
특별히 스타일을 정해놓거나 트렌드를 따르기보다는 그날의 기분이나 상황에 맞춰 스타일링을 하는 편이에요. 그래야 자연스럽고 멋진 스타일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요즘엔 상대적으로 패션에 대한 관심이 줄었어요. 예전에는 널리 유행하기 전에 먼저 입어보는 즐거움이 컸는데, 그림에 빠지고 나니까 ‘굳이 나를 옷으로 표현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그림이 표현해주니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쇼핑도 덜하게 되고요. 네일 숍도 작년 <라디오스타> 출연 이후로 진짜 오랜만에 다녀왔어요. 오늘 화보 촬영을 위해서요. 올해는 다시 패션에 관심 좀 가져보려고요 해요.(웃음)

특별한 집콕 라이프가 있다면요?
요즘 남편이 칵테일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덕분에 집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칵테일을 마실 수 있게 되었어요. 레몬이나 라임, 딸기처럼 신선한 제철 재료를 올려 만든 남편표 칵테일은 많이 마셔도 숙취가 없는 것 같아요. 하하. 샤부샤부, 월남쌈처럼 다양한 채소를 많이 섭취할 수 있는 메뉴도 종종 만들어 먹어요.

몸매 관리 때문에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하나요?
아뇨. 만들기 쉽잖아요. 하하. 제가 아는 정육점에 수요일마다 좋은 고기가 들어와요. 채소만 미리 이것저것 사놨다가 간단하게 만들어요. 요리가 쉽지는 않잖아요.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게 좋아요. 전 침샘이 굉장히 발달했어요. 공복 혈당도 높은 데다 먹는 걸 워낙 좋아하니 운동을 안 할 수가 없죠. 운동이 마냥 즐겁지는 않지만 하루에 1시간 꽉 채워 PT를 하고 있어요. 부부리와의 산책도 매일 거르지 않는 루틴이고요.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또 원하는 만큼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체력을 키우려고 해요. 예뻐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건강을 유지하고 지키고 싶어서요.

화이트와 브라운 배색 슬립 드레스는 KIJUN 스트랩 샌들은 YIEYIE 시퀸 소재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하루 중 언제 가장 행복한가요?
잠들기 바로 직전이요. 보통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읽고 싶었던 책을 펼쳐보는 시간이에요. 온전하게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순간이죠. 하루를 마무리하고 차분하게 자리에 눕는 순간은 현실에서 살짝 벗어난 또 다른 세상처럼 평온함이 느껴지거든요.

최근에 읽은 책을 소개해주세요.
남편이 추천해준 «사피엔스»요. 그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인간이 지구를 다 망가뜨리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너무 미안했죠. 또 한편으로는 아직 한 세기도 못 살았는데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렇게 세상이 금세 변하는데 내가 죽은 뒤에는 얼마나 더 재미있는 게 많을까, 마지막까지 궁금해하다 눈감지 않을까 하고요.

혜영 씨를 이토록 열정적인 사람으로 만든 원동력이 궁금해요.
DNA! 부지런하고 열정 넘치는 성격은 아무래도 가정환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살던 집이 인천 수봉산 중턱에 있어서 수도 없이 언덕을 오르내렸어요. 여름엔 하루에 몇 번씩 샤워를 해야 했죠. 그곳에서 엄마는 정원을 가꾸고 채소도 직접 키우셨어요.
늘 부지런한 엄마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도 무시 못하죠.

이혜영은 촬영 내내 뷰파인더 속의 자신을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유심히 관찰했고, 스태프들과 호흡하는 목소리는 더없이 청량했다. 이혜영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삶의 즐거움은 어디에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반려견과 산책을 하는 모든 순간까지. 이혜영식 행복의 비결은 복잡하게 생각지 않는 것이다.

세 가지 컬러가 어우러진 미니 드레스는 ADER ERROR

본격적으로 그림 얘기를 해볼까요?
그림은 어린 시절부터 빼놓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었어요. 어렸을 때 친구들이 문구점에서 파는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 때도 전 인형과 옷을 직접 그리며 놀았으니까요. 하루 종일 집 마당에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했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해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은 없지만 그때도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일은 가장 하고 싶고, 또 가장 좋아하는 일이에요.
SNS상에 직업을 예술가로 적었어요. 딸이 해준 거예요. 하하. 예술가도 아니었는데, 그때 나는 꼭 화가 이혜영이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결론은 화가였으면 좋겠어요. 제 소망이 담긴 직업이죠.

얼마 전에 전시를 열었죠.
<동그란 무언가>라는 이름의 네 번째 개인 전시였어요. 당시 집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 외에도 여러 상황이 겹쳐 꽤 오래 걸렸어요. 그래서 내 집이 아닌 곳에서 한참 머물렀죠. 그렇게 안정감이 없는 상태에서 그린 시리즈예요. 1년 반 정도 정말 쉬지 않고 그렸어요.

지금까지 그린 그림은 총 몇 점이인가요?
250~260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작은 작품까지 다 세면요. 2010년에 그림을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하루에 캔버스를 서너 개씩 펼쳐놓고 이거 그렸다 저거 그렸다 난리도 아니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욕심을 내다 보니 몸도 많이 상했죠. 지금도 오른팔과 목, 어깨가 항상 아파요. 일주일에 한 번은 병원에 가서 재활 겸 운동을 하고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아요. 사실 유화 물감이 몸에 되게 안 좋아요.게다가 눈도 점점 나빠져서 문제예요. 그래도 좋으니 어떡하겠어요, 그려야지. 그림 그리는 사람은 다 알 거예요.

최근 작품 중에 초록색이 눈에 많이 띄었어요.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어요. 어렸을 때 산 중턱에 살기도 했고, 자연 속에서 성장해 좋아하나 봐요. 초록색을 보면 기분 좋고 편안해지잖아요. 오늘 촬영 때 입은 초록색 드레스도 정말 마음에 들더라고요.

작업실도 궁금해요. 취향 좋기로 유명한 컬렉터잖아요.
집 인테리어를 해주시는 분이 화가를 몇 분 알아서 그림 그리기 좋은 작업실 공간을 만들어줬어요. 수납공간이 기가 막혀요. 재미있는 건, 제가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서 어떤 도구가 좋은지 모른다는 거예요. 화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그냥 사요. 지금 쓰고 있는 그림 도구들이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지금도 알아가는 단계죠. 혼자 이런 붓은 어떻게 쓸까 생각하고 이것저것 써보면서 터득하고 있어요. 그래서 뭔지도 모르는 희한한 것도 진짜 많이 사봤어요. 하하.
작품을 통해 세상에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제 그림을 통해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을 마주하게 되면 좋겠어요. 울 수도 있고 웃을 수도 있고, 행복하기도 하고요. 그 외에는 더 바랄 게 없어요.

평소 어디에서 영감을 받나요?
특별히 영감의 대상을 찾거나 영감을 받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아요. 주로 저 자신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은 대상이 생겨나는 편이에요. 끊임없이 생각하고 한참 고민하다 보면 ‘아, 그리고 싶다’는 모티프들이 떠오르죠. 오히려 방송 활동을 할 때나 대본을 외울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 같아요. 체력 소모도 생각보다 훨씬 크고요.

작품을 완성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그림의 주제를 고민하는 순간부터 완성하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두근거려요. 그리고 작품을 마무리할 때마다 다시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는 설렘을 느끼겠구나 생각해요. 새로운 작품을 위해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펼치는 즐거움이 시작되는 순간이니까요.

니트 소재 브라톱은 COS 미니멀한 슬리브리스 드레스는 LOW CLASSIC 볼륨 슬리브 시스루 톱과 리본 장식 양말은 모두 H&M × SIMONE ROCHA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요즘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계획이 있어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제 모든 작품을 영상으로 구성한 특별 전시를 열고 싶어요. 언제쯤 현실화할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요. 방송도 그림 때문에 뜸했는데, 다시 도전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좋은 기회가 오면 즐겁게 해보려고요.

혜영씨는 어떻게 나이 들고 싶나요?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늦은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상황이라. 이제 출발이니 이렇게 가다 끝날 수도 있고, 아직 잘 모르겠어요. 주변의 좋은 사람들을 떠나보내지 않고, 나한테 나쁘게 했던 사람도 용서해주면서 그냥 행복하게 살다 가면 어떨까 싶어요. 인생 뭐 있겠어요?

방송인이자 화가 그리고 누군가의 아내이자 친구 같은 엄마.
무엇으로 불리든 이혜영은 즐거운 삶을 찾아가고 있고, 삶의 열정은 멈출 생각이 없다. 인터뷰를 막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휴대폰이 울렸다.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또 만나요!”라고 보내온 그녀의 사랑스러운 메시지 덕분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단순한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Fashion Editor jihye han
Photographer yonggyun 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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