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방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던 예술가들이 평생 머문 공간은 여전히 그가 전하는 온기로 가득 차 있다. 공기마저 예술의 기운으로 가득한 예술가들의 방을 차례로 둘러봤다.


place 01 최만린 미술관

지난해 11월에 작고한 조각가 최만린은 한국 근현대 조각 예술의 선구자로 손꼽힌다. 특히 추상 조각 발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한 ‘한국 미술 교육 1세대’이기도 하다. 이후 미국 프랫인스티튜트를 거쳐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와 학장,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두루 역임했다. 최만린 미술관은 이런 그가 1988년부터 30년 넘게 거주하며 작품을 만들고 생활하던 공간이다. 미국에서 돌아와 1970년대부터 줄곧 정릉 인근에서 살았던 그는 1988년 이 2층 양옥집을 작업실로 꾸몄다. 단정하게 쌓아 올린 벽돌, 정갈한 마당, 높은 층고까지 그가 추구하는 추상 조각을 구현하기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집이었다. 대문과 현관문을 다시 칠하고, 작품이 놓일 1층 바닥과 커다란 창호를 조금 손본 것을 빼면 집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작업 공간으로 쓰인 1층 거실, 손님을 맞이하던 응접실, 말년까지 흙과 석고를 매만지던 자리도 거의 그대로다. 50년 된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작가가 주로 머물렀던 사무실과 아카이브 공간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 신문과 잡지 등에 게재된 기사 등이 시기별, 중요도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한국 현대 미술사의 중요한 사료가 될 만큼 방대하고 구체적인 자료들이다. 한국적 음과 양의 조화를 기하학적 조형물로 탄생시킨 예술가의 오랜 기록 앞에서 왠지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주소 서울 성북구 솔샘로7길 23


place 02 권진규 아틀리에

성북구 동선동의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강렬한 보랏빛을 내뿜는 대문 하나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한국 근대 조각을 대표하는 권진규 작가가 생전에 살았던 집이다. 10여 년의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59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터를 잡은 작가는 2년 동안 직접 설계와 건축을 도맡아 이 집을 완성했다. 아틀리에에 들어서면 거대한 부조 작품이 눈에 띄는데, 본품은 삼성미술관에 전시 중이고 삼성미술관에서 직접 복제품을 만들어 증정해준 것이다. 권진규 작가의 작업실은 부조 작품 왼편으로 나 있는 작은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 낡고 위태로운 모습은 예술가의 고독한 삶을 고스란히 견뎌온 세월의 흐름을 오롯이 담고 있다. 오래된 의자와 이젤, 작품을 진열하는 선반, 테라코타 작업을 주로 했음을 보여주는 작은 화덕과 우물까지 모두 작가가 손수 만들었다. 저 작은 우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작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감을 길어 올렸을 것이다. 서양의 추상 조각이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 신라시대 토우를 연상시키는 한국적 사실주의를 흙으로 빚어낸 작가의 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주소 서울 성북구 동소문로26마길 2-15


place 03 고희동 미술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춘곡 고희동 화백의 다양한 작품이 탄생한 곳이자 당대 서화가들이 교류하던 공간이다. 그 시절의 한옥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근대 건축 문화유산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작가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 직접 설계한 한옥으로, 이곳에서 41년간 생활했다. 가옥에 들어서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체감할 수 있는데, 전통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긴 복도와 그 옆의 커다란 창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계단 등이 그것이다. 채와 채 사이를 분리하는 한옥과 달리 이동의 편리에 중점을 둔 점은 전형적인 일본 가옥 형태다.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해 서양화를 배운 고희동 화백은 고국으로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작업실이 초창기 서양화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담당한 흔적은 그 시절의 풍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금의 가옥은 보수공사를 거쳐 아쉽게도 원형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00년 넘게 전쟁과 약탈을 견뎌온 탓이다. 고희동 화백의 자화상 작품 3점은 도쿄예술대학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작품들은 상당수가 영인본이다. 그 와중에 동양화와 서양화를 절충한 그의 독특한 산수화, 요즘은 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근대적 한옥의 변화 양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방문해볼 만한 곳이다. 주소 서울 종로구 창덕궁5길 40

Editor 김은향
Photographer 정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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