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은 어떻게 자연으로 이어지는가

현재 한국에서 조경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바로 ‘제주 베케’의 김봉찬 대표다. 그는 전통적 방식에서 완벽히 벗어난 가드닝으로 정적인 정원 문화에 펄떡펄떡 뛰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식물과 나무가 온전히 각자의 생김새대로 비집고 올라온 그의 정원은 공간의 새로운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비가 오니까 오히려 좋네요. 보세요. 평소 정원의 색과 다르잖아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제주 남쪽 끝에 있는 ‘베케’를 찾았다. 걱정과 달리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물은 더 짙고 선명한 초록을 만들어냈다. 비를 거추장스러워하는 건 사람뿐. 풀과 나무와 꽃은 마치 자연이 선사하는 축복을 만끽하듯 가지와 잎의 힘을 빼고 한가로이 비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종종거리던 마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자연은 그렇게 위안과 해답을 동시에 툭 던져놓고 다시 제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제주 베케의 김봉찬 대표는 국내 생태 정원의 선구자로 불린다. 자연주의 정원을 향한 지금의 뜨거운 관심이 그의 정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차가운 콘크리트 외벽으로 둘러싸인 ‘아모레성수’의 식물 군락, 잘 빚어놓은 공예품처럼 정갈하고 반듯한 ‘모노하 한남’ 안마당에 실크 카펫처럼 깔린 이끼 정원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소란스러운 도회지에서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주목받은 공간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를 통해 그는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시각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3년 전 문을 연 제주 베케는 그가 추구하는 생태주의 정원의 전형을 보여준다. 1만㎡에 달하는 정원에는 수백여 종의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자생하고 있다.

‘베케’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세련된 외국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주 방언이라고요.
화산섬인 제주는 땅속에 화산석이 많아서 농사짓기가 어려워요. 밭일을 하려면 쟁기로 그 돌들을 다 걷어내야 하는데, 이때 캐낸 돌들을 밭 주변에 아무렇게나 쌓아두었죠. 그렇게 생긴 두꺼운 돌무더기를 ‘베케’라고 해요. 제주에는 가는 곳마다 베케가 있어요. 경관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베케를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레인으로 허물고 치워버리는데,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좀 안타깝죠.

이곳을 베케라고 이름 지은 이유가 있나요?
식물이 나고 자라는 곳을 떠올려보세요. 오래된 아파트의 담벼락 밑, 사람들이 수시로 밟고 지나다니는 보도블록 사이에서 고개를 비죽 내밀죠. 생명력이 참 놀라운 것이, 아주 좁고 열악하더라도 자랄 만한 환경이 조성되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뿌리를 내려요. 자라지 말라고 잘라내도 어느 틈엔가 또 불쑥 자라 있죠. 집 안에서 키우는 화분만 보더라도 ‘어떻게 저기서 새싹이 돋아났지?’ 싶은 것들이 있잖아요. 베케도 마찬가지예요. 독특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생겨난 이 엉성한 돌무더기에서 어느 순간 이끼나 참나물, 얼음나물 같은 풀들이 자라고 있어요.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았는데 말이죠. 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베케도 저 자리에 쌓인 지 400년은 족히 됐을 거예요. 그래서 누가 ‘베케는 언제 만들어졌나요?’ 물으면 ‘400년 전이요’라고 답합니다.

원래 꿈이 조경가는 아니었죠?
식물을 오랫동안 연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 공부가 참 싫었어요.(웃음)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어서 열일곱에 절에 들어가 1년 정도 살았어요. 절간에 들어가면 집중 좀 할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런데도 공부는 영 손에 안 잡히더라고요. 그때 산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온종일 산에서 자라는 온갖 야생화를 보며 시간을 보낸 거예요. 꼬리풀, 베로니카, 산박하, 땅나리, 원추리 등 지금 베케에 있는 풀과 꽃을 그때 처음 봤죠. 할 일이 없으니 그런 것들을 모아 표본을 만들기도 하고요. 다시 산을 내려와 이렇게 저렇게 학교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식물을 공부하게 됐어요(그는 제주대학교에서 식물생태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대학을 갔더니 제가 죄다 아는 것만 가르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공부 안 하고 식물만 갖고 놀던 것이 일종의 예습이 된 셈이죠. 다들 ‘넌 어떻게 식물을 그리 잘 알고 잘 외우냐’며 마치 천재 보듯 하더라고요. 하하. 당연히 잘 알 수밖에요. 책에 나온 것들을 저는 산에서 직접 봤잖아요. 그때부터 식물 공부가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정신없이 파고 들었죠.

대학 졸업 후 여미지식물원에서 처음 일했죠? 식물 천지인 곳이라 직장이 곧 놀이터 같았겠어요.
솔직히 얘기하면 지루했어요.(웃음) 저는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생태를 연구하고 야생 식물을 보는 것이 좋았는데, 거기에서는 ‘팬지를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키울까?’ 같은 고민을 해야 했거든요. 물론 식물을 키우고 다루는 법을 배우기도 했지만, 진짜 좋았던 건 따로 있어요. 구하기 힘든 식물 관련 책이 정말 많았거든요. 한가할 때마다 식물, 나무, 토양 등 각종 전문 서적을 섭렵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가드닝에 대한 책도 그때 접했고요. 뚜렷하게 뭔가를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식물을 가까이서 보고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충분히 행복했어요.

평강식물원으로 일터를 옮긴 뒤에도 계속 그렇게 공부만 했나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평강식물원은 여미지식물원보다 더 한가했어요. 아침에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으면 저 멀리 달구지 끌고 밭에 일하러 가시는 할아버지가 보여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그 할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이면 하루가 끝나는 거예요. 그렇게 시간이 남으니 뭘 했겠어요? 하염없이 식물하고 나무만 쳐다봤죠. 그때 굉장히 재미있는 경험을 했어요. 매일 똑같아 보이는 나무인데 어느 날 추워지니까 가지 색이 붉어지더라고요. 분명히 저번에 봤을 때보다 붉은색이 더 진해진 거예요. 줄기의 모양이나 색, 생식 주기야 책에서 봐서 알지만 계절에 따라 줄기 색이 바뀐다는 건 논문에도 안 나오는 얘기거든요. 그때부터 식물원에 있는 나무를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어요. 몇 개월 관찰하니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나무들이 있더라고요. 죄다 초원과 숲 사이에 사는 양수들이었어요. 겨울에 초식동물들에게 가지가 뜯기지 않으려고 색을 더 강렬하게 내면서 위협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죠. 플라타너스나무 아시죠? 겨울이 되면 갈색과 붉은색으로 된 표피 얼룩의 대비가 진해지면서 색이 아주 난리가 납니다. 또 자작나무는 줄기가 흰색이잖아요. 그게 훨씬 더 하얘져요. 이런 특징들을 정리하다 보니 처음 보는 해외 수종도 대충 서식지에 따른 특징이 보이더라고요. 식물에 대해 단순히 습득하는 게 아니라 서식 환경과 자생 환경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생태를 기반으로 한 조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나요?
제가 추구하는 것을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서식처 기반 정원’이에요. 말 그대로 식물의 서식처를 그대로 재현하고 풀과 나무의 생김새와 생식을 존중하는 거죠. 평생 식물만 연구하고 공부할 줄 알았는데, 그때 제가 뭘 하고 싶은지 뚜렷이 보였어요. 풀과 나무가 원래 타고난 대로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보고 싶다, 식물을 정말 잘 키워보고 싶다고 말이죠. 그래서 ‘더 가든’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조경을 시작한 거예요. 그때가 마흔다섯쯤이었으니까, 이제 13년 정도 됐네요. 목표가 거창하지도 않았어요. 월급 정도의 벌이만 꾸준히 유지되면 나머지는 내가 좋아하는 식물을 찾아서 잘 가꾸는 일만 평생 하고 살아도 행복하겠다 했지요.

김봉찬만의 생태 정원을 처음으로 선보인 곳은 어디인가요?
‘수풍석 박물관’으로 유명한 제주 비오토피아의 전체 단지 조경을 담당하게 됐어요. 직접 계획·설계하고 시공까지 한 첫 상업 공간의 정원이죠. 당시만 해도 서식지를 그대로 복원한 생태주의 정원이 생소했던 데다 단지 규모가 제법 커서 전문가로 입지를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된 작업이에요. 그 작업을 통해 식물에 대한 제 철학과 생태주의 정원에 대한 신념이 한국에서도 충분히 구현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사실 서양에서는 생태주의 정원이 아주 오래전부터 발달해왔어요. 독일, 네덜란드, 일본 등 정원 문화에 관심이 높은 나라의 생태 정원에 가보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예요. 일본 도쿄에 가면 ‘아모레성수’ 정원보다 규모가 100배쯤 큰 생태 정원이 도심 한가운데 있어요.

자연을 그대로 옮겨놓았을 뿐인데, 굉장히 트렌디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진짜 자연은 인공적인 것을 만났을 때 더 빛을 발합니다. 온통 자연인 곳에 가면 탁 트인 해방감을 잠시 느낄 수 있지만 계속 보다 보면 감흥이 떨어져요. 그런데 그 옆에 현대적인 인공물이 하나 있으면 자연이 주는 감동이 드라마틱하게 극대화돼요. 그 인공물은 건축일 수도 있고 조형물일 수도 있죠. 제주 베케에 있는 저 돌담은 이제 공간의 오브제가 됐어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자연물에 예술품의 가치가 부여된 셈이에요. 같은 맥락에서, 도심 속 정원들은 앞으로 더 주목받게 될 거예요. 어설프게 돌을 깔고 흙길을 내서 자연을 흉내 내는 조경은 결국 외면받을 거예요. 가끔 저한테 서울에도 베케 같은 생태주의 정원이 가능하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물론이죠! 도시 한가운데도 식물이 온전히 자랄 수 있는 서식지를 조성할 수 있고, 도시이기 때문에 그 정원이 주는 기쁨을 훨씬 크게 느낄 수 있어요.

한 인터뷰에서 ‘고인 물은 썩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서부터 생명이 시작된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산의 깊은 골짜기에 한번 가보세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식물이 별로 없어요. 폭포가 떨어지면서 물방울이 튀고 공기 중의 산소를 물이 품어요. 그래서 물이 깨끗하죠. 그렇게 물이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강이 되잖아요. 강은 낙차가 없기 때문에 물의 운동성이 떨어지면서 물속 산소포화도가 낮아집니다. 그때 강한 햇빛을 받으면 녹조류가 생기고, 이 녹조를 정화하기 위해 다른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나죠. 비슷한 원리입니다. 고여 있는 물은 인간의 시선에서는 썩은 듯 보이지만 자연의 시간에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에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늪은 완전한 생태계, 생명의 원천을 갖추게 돼요.

‘언젠가 사그라진다’는 것은 트렌드의 숙명이잖아요. 생태주의 정원도 그렇게 될까요?
아뇨.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오히려 생태주의 정원이 더 정교하게 발달하겠죠. 저는 세상에 두 가지 정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생태 정원과 그렇지 않은 정원. 그렇지 않은 정원은 사람만을 위한 장식과 치장으로 공간을 채운 정원을 말해요. 잘 정돈된 옛날 영국식 정원, 프랑스의 기하학적인 정원, 일본의 고산수 정원이나 미니어처 정원들처럼요. 인류의 정원 문화는 생태주의, 자연주의 방향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어요. 식물을 존중한다는 건 곧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예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 중에서 자기가 사는 곳을 파괴하는 생명은 인간뿐이에요. 집에다 똥을 싸는 격으로 지금껏 살아왔죠. 그로 인한 문제들이 이미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고,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사람, 생명과 더불어 사는 정원을 추구할 수밖에 없어요.

단순히 식물을 가꾸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넘어 정원을 통해 삶과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이군요.
정원에는 그곳을 가꾸는 사람이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그대로 드러나요. 정원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이미 생태 정원에 대해 사회·경제학적으로 치열하게 연구, 발전시키고 있어요. 생태주의를 넘어 ‘생태혁명’이라고도 하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에요.

베케의 커다란 유리창을 정원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 둔 이유도 있나요?
그렇죠. 아마 정원과 동일선상에 두었다면 ‘아, 정원인가 보다’ 했을 거예요. 그래서 단차를 두고 정원을 살짝 위로 올려다보게 설계했어요. ‘아, 자연이구나!’ 할 수 있도록요. 여기에 잠깐 앉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자연의 놀라운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평생 지구를 훼손하며 살고 있으니 잠시나마 자연에 겸손해져도 괜찮잖아요.(웃음)

이제 사람들이 생태주의 정원의 가치를 조금씩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다음 목표는 무엇인가요?
원래도 그랬지만, 대단하고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그저 지금껏 해온 대로 꾸준히 정원을 가꿀 뿐이죠. 큰 규모의 프로젝트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데, 그건 진짜 제가 원한 삶이 아니에요.(웃음) 저는 지금도 산에 가서 새로운 야생화나 식물을 만나는 때가 가장 즐거워요. 그걸 채집해서 제가 만든 이 생태 정원에 완전히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 저의 일이죠. 조경가로서의 목표라면, 생태주의 정원을 넘어 완벽한 자연주의 정원을 구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지금도 베케는 농약과 퇴비, 제초제는 일절 쓰지 않아요. 3년 전 심은 풀과 나무를 그대로 둔 채 성체가 될 때까지 땅을 파주고, 튀어 올라온 것들을 다듬기만 했죠. 자연주의 정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식물과 연관된 모든 동물, 벌레, 곤충, 미생물의 관계까지 연구해서 ‘진짜 서식처’를 조성하는 거예요.
그걸 해보고 싶어요.

반려식물을 키우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요.
화분 하나라도 ‘관리한다’고 생각지 말고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무엇인지 한번쯤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가장 중요한 건 미래 세대예요. 아이들한테 꾸미지 않은 생태와 자연을 많이 보여줘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자연과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도록요. 보는 것만 조금 달라져도 사람의 생각을 크게 바꿀 수 있어요.

 

 

 

Editor 김은향
Photographer 정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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