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한 나이, 오십

뼈에 새긴 듯한 성실함과 타고난 둔감함을 무기로 30년간 잡지사 에디터로, 조직에 충실한 직장인으로 살아온 작가 이은숙은 어느 날 ‘불량 인생’을 선언했다. “남들은 그러라 그래, 난 내 방식대로 살 거야”라고 말하며.


≪불량한 오십≫의 작가 이은숙은 <주부생활> 기자를 시작으로 30년간 <우먼센스> 등 여러 잡지의 편집장을 거치며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불현듯 사표를 던졌다. 정년을 딱 1년 앞둔 해였다. 오랫동안 꿈꾸고 상상한 대로 ‘직장에서의 쿨하고 멋진 마지막 모습’을 실천에 옮기며 인생의 전반전을 호기롭게 마무리한 뒤 찬란한 인생 후반부를 시작한 것이다. 책 ≪불량한 오십≫은 남들은 몸 구석구석 들끓던 열정과 에너지가 식어가고, ‘버티는 사람이 승자’라는 오기로 겨우겨우 살아남기에 돌입할 나이에 ‘불량한 백수 아줌마’가 된 작가의 이야기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서툴고 투박한 나, 어쩌다 서로의 포로가 된 가족, 끊임없이 ‘중년다움’을 강조하는 세상과 현명하게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정년이 1년밖에 남지 않았을 때 회사를 그만두었어요.
직장 생활 끄트머리에 가까워오면서 스스로 내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봤어요. 그만둘 때는 내 발로 걸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나의 30년 사회생활을 떠올리면 ‘근면’과 ‘성실’만 남을 정도로 완벽주의였거든요. 일찍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다 보니 가장이라는 책임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요. 내 밥값을 하고 존재를 증명하려고 매달 마지막인 것처럼 몰아붙였어요. 그러다 어느 날 ‘이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났어요. 그때가 딱 50대 중반이에요.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게 벌써 6년 전이에요. 이후의 일상은 만족스러운가요?
성실하게 살아온 세월에 대해 보복이라도 하듯 아주 한가롭고 여유롭게 보내고 있어요. 평일 오전에 아무도 없는 동네 공원을 걸을 수 있고 각자 흩어져 지내던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수다 떠는 단순하고 편안한 날들의 연속인데 싫을 이유가 있나요.(웃음) 만들 때마다 맛은 조금씩 다르지만 김치를 직접 담그기도 하고요. 회사를 그만두고 내 살림 솜씨가 진짜 형편없다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는 잠깐 당황스럽기도 했죠.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결론을 얻었어요. ‘평생 김밥 한 줄 안 싸보고 죽으면 어때, 이런 인생도 있는 거지!’ 하고요. 하하. 대신 나를 즐겁게 하는 소소한 취미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내 50대는 충분히 만족스러워요.

책 제목이 ≪불량한 오십≫이에요. 왜 하필 50인가요?
직장에 다니든, 평생 전업주부로 지내든 나이 쉰이 넘으면 어느 정도 인생의 견적이 나오잖아요. 갑자기 숨겨둔 유산이 튀어나오지도 않을 테고, 이제 와 운명의 상대를 만날 것 같지도 않고, 자식들 앞날도 대충은 짐작이 되죠. 그래서 인생이 시시하냐면, 그렇지는 않아요. 50대가 진짜 좋은 이유는 인생이 별 볼 일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던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깨달음도 생겨요. 30대의 불안과 40대의 자기 반성을 다 거친 편안한 시기랄까. ‘편집장’이니 ‘국장’이니 하는 타이틀을 떼고, 오십 중반에야 바라본 나이 듦에 대한 생각, 가족의 본질,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고민들을 책에 담았어요. ‘인생 별거 없어, 오늘 하루 잘 살자’는 메시지와 함께요.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책 내용을 꼽자면요?
‘운칠기삼(運七氣三)’은 제 인생의 중요한 모토이자 인생을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말이에요. 화려한 성공 뒤에는 수많은 우연과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뤄진 운이 7 정도 자리한다는 의미죠. 실패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의 성공 또는 실패가 오롯이 그 사람의 몫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러니 우리는 오늘 하루 3 정도의 노력만 해도 충분하다고요. 그 결과는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기도 해요. 우쭐댈 필요도, 좌절할 이유도 없죠.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사는 게 중요해요. 하루 주어진 몫만큼만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너무 얽매이지 말았으면 해요. 그게 제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고요.

더 중요한 건 남은 인생이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건강!’을 외치는 요즘 분위기로 보면 정말 100세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인생이 정말 길어요. 다들 한번쯤 10년 뒤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봤음 좋겠어요. 그때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러려면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한번 그려보는 거예요. 죽기 살기로 해야 하는 일 말고 가늘고 길게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님이 그리는 10년 후 삶은 어떤 모습인가요?
멋지고 쿨하지만 따뜻함도 지니고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웃음) 내가 이루고 쌓아온 일들에 크게 의미부여하지 않고 가볍게 살고도 싶고요. 다행히 태생적으로 좀 둔감한 편이에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크게 관심이 없어요. 그런 타고난 기질이 조직 생활에서는 큰 도움이 됐어요. 싱글맘의 여성 관리자가 남 눈치까지 봤다면 아마 그렇게 오래 못 버텼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 성격 때문에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남의 고민이나 상처들을 별것 아닌 듯 얘기했을 수도 있고요. 그래서 나이가 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뒤늦게 시작한 요리와 살림 솜씨도 조금 늘면 좋겠고요.(웃음) 살림 천재인 몇몇 친구들처럼 윤기 나는 살림까지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요리 몇 개 정도 있으면 좋잖아요.

이 책을 어떤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이 책의 미덕과 매력을 꼽자면 솔직함이 아닐까 싶어요. 아는 척, 아닌 척, 그런 척하면 아무리 포장을 잘해도 공감을 할 수가 없어요. 대단한 조언을 하고 싶어서 이 책을 쓴 건 아니에요. 그저 제 상황과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고, 다들 비슷비슷한 고민을 하며 산다는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 싶었죠. 책을 읽는 각자에게 마음에 남는 한두 구절만 있어도 저자로서는 성공한 게 아닐까요. ‘뭐든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니구나’ ‘최선을 다하되 아니면 말고’ 정신으로 무장하는 거죠.

좋은 인생이란 뭘까요?
하루를 마치고 자려고 누웠을 때 머릿속을 괴롭히는 고민이 하나도 없으면, 저는 그게 진짜 ‘행복’인 것 같아요.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이 잘 보냈구나, 할 일을 다 마쳤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 꽤 괜찮은 인생 아닌가요.

Editor 김은향
Photographer 정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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