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인간적인 윤유선

소매 러플 디테일의 블랙 니트 톱 앤디앤뎁, 기하학적 패턴 스커트는 올라카일리, 큐빅 장식링과 진주 이어링 모두 엠주.

채우기보단 비우는 데 익숙해 의외로 구멍이 많다는 ‘신사허당’ 윤유선. 그녀는 멋진 여자가 되기보단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배우의 진면모는 카메라가 꺼지고 레코딩이 멈춘 뒤 드러나는 법.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 게 속편할 때도 많다. 현장에 나가면 ‘선배급’ 대우를 받는 여배우들은 대개 까칠한 포스로 자신의 이력을 증명하려 들지만, 윤유선은 정반대였다. 내년이면 딱 50이라는 그녀는 유연했고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리고 옅은 주름이 잡힌 고운 얼굴은 행복한 인생을 대변하는 듯했다.
“나이 들어가는 게 마냥 싫진 않아요. 자연스럽잖아요. 붙잡고 싶은 욕심도 별로 안 드네요. 내년에 쉰이 되는 터라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긴 하지만요. 어른이 되느냐, 노인이 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 같달까요.”
채울수록 부족한 사람과 비울수록 풍성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후자다. 잘 늙고 싶다는 그녀는 주름을 펴고 싶은 욕심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바람도 없다. 그저 흉하지 않게 잘 늙어가는 것이 소망이라면 소망이다. 욕심을 내면 그 생각 안에 갇히기 때문에, 뜻대로 안 되는 일은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고. 살아보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물며 내 배에서 낳은 자식조차도. 그럴 때도 ‘그러려니’ 해버리는 게 그녀가 사는 방식이다. 작품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 욕심을 내기보단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최대한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를 선택한다.
“20대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그땐 미래가 너무 불확실했거든요. 일곱 살에 아역배우로 데뷔해 얼굴을 알렸으니 성인배우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불안했죠. 그렇다고 공부를 더 하거나 마음껏 여행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늘 마음이 헛헛했어요. 남들이 다 하는 쇼핑에 빠져들기도 했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어떤 예쁜 가방도 제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남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라는 사실도요.”
어쩌면 그녀의 이런 여유는 다 가졌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실제 그녀는 판사 남편, 유순한 두 아이와 함께 평탄한 가정을 이루고 있고 연기자로서도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전 조금만 가져도 행복함을 느껴요. 남들은 남편이 판사기 때문에 제가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판사가 그리 화려한 직업은 아니잖아요. 결혼할 때도 직업을 본 건 아니에요. 결혼 당시 남편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거나 든든한 배경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요. 소개받은 지 일주일도 안 돼 남편이 자신의 조건이나 상황을 진솔하게 말해줬는데 그런 면에서 믿음이 갔어요. 알아갈수록 사람 됨됨이가 마음에 들었고요. 그래서 100일 만에 결혼했나봐요.”
만나기 전엔 직업이 판사라기에 오히려 거절하려 했다. 일하는 분야가 너무 다른데다 직업상 보수적이고 재미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 만나보니 의외로 자유분방한데다 가식 없고 솔직해 서서히 마음을 열게 됐다.
“남편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에요. 저와는 달리 인내심이 강해요. 화도 잘 안 내는 편이고요. 얼마 전에는 도로에서 급하게 차선을 바꿨는데 뒤따라오던 운전자가 심하다 싶을 정도로 화를 내면서 계속 시비를 걸었어요. 사실 웬만한 남자들 같으면 감정적으로 대립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남편은 인상 한 번 안 찌푸리고 끝까지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플리츠 디테일의 블라우스 세컨플로어, 옐로 컬러 슬랙스 지컷.

<엄마가 뭐길래>에도 등장하는 두 아이, 동주와 주영이는 한창 사춘기다. 특히 큰아들 동주가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해 그녀도 다른 엄마들처럼 슬슬 입시가 걱정되는 시점. 하지만 남편이 깔끔하게 상황 정리를 해줬다. 지금은 아이들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 같지만, 나이 들면 자식은 떠나기 마련이니 부부가 더욱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남편이 내린 결론은 “애들보다 나한테 잘해!” 였다나.
“제가 작품 들어가면 바빠지잖아요. 남편도 업무상 새벽에 퇴근할 때가 많고요. 그래서 저희는 아이들에게도 양보단 질적으로 잘해주려고 노력해요. 학교행사에 참석을 못해 제가 죄책감을 느끼면 남편이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고 위로해줘요. 나쁜 짓하느라 아이들을 등한시하는 게 아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니까 괜찮다고요. 가만 생각해보면 제가 일을 접고 집에만 있는다고 아이들한테 퍼펙트한 엄마가 되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대신 최대한 아이들과 공감하려고 노력해요.”
지금이야 손 가는 일이 많이 줄었지만 아이들이 어릴 땐 힘들었던 기억도 많다. 지방 촬영이 있을 때 다른 배우들은 전날 미리 내려가 컨디션을 조절하지만,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아이들 옆에 있고 싶어 새벽 일찍 집을 나섰던 적이 부지기수. 또 촬영이 밤 늦게 끝나도 기를 쓰고 서울로 올라왔다. 몸은 힘들어도 아이들이 잠든 모습이라도 봐야 마음이 편했다. 때문에 그 무렵엔 그녀의 매니저도 새벽 운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온 윤여정 선생님이 저한테 애들 초등학교 졸업하면 만나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전까지는 자유시간이 없을 거라고요. 아이들이 커갈수록 그 말씀이 생각나더라고요. 사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절실한 순간은 몇 년 안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저와 함께하는 시간이 별로 없거든요. 이제 동주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정말 몇 년 안 남은 것 같아요. 아쉽지만 붙잡고 싶진 않아요. 각자의 생활이 중요하니까. 아이들을 떼어놓는 연습도 천천히 해야죠.”
외모부터 성격까지 아빠를 꼭 닮은 두 아이 모두 한창 사춘기지만 딱히 부모를 힘들게 하는 일 없이 무던하게 지나가고 있다. 이유 없이 예민하게 구는 여느 사춘기 아이들과는 달리 엄마와 함께 있는 모습이 더없이 친밀하고 좋아 보였는데, 간섭하거나 강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켜봐준 덕분 같다고.
“아들딸이 제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만스러울 정도는 아니에요. 제가 해준 게 없어서 그런지 ‘왜 이것밖에 못해’라는 마음보다는 ‘해준 것도 없는데 꽤 하네’ 싶어 대견하거든요.”
공부도 마찬가지다. 천성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동주는 초등학교 때 “딴 생각을 잠깐 하다보니” 시험지 앞장만 풀고 뒷장은 아예 못 풀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도 그녀는 “좋은 경험했네, 앞으로는 집중해” 하고 웃었다. 마음속으론 왜 그랬을까 싶다가도 ‘초등학교 시험이 인생에서 뭐라고’ 하는 생각에 아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중학교 땐 안 틀려도 될 문제를 계속 틀리자, 담임선생님이 “집에서 안 혼내시죠?” 하고 물어볼 정도였다.

아들딸이 제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만스러울 정도는 아니에요. 제가 해준 게 없어서 그런지 ‘왜 이것밖에 못해’라는 마음보다는 ‘해준 것도 없는데 꽤 하네’ 싶어 대견하거든요. 제일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는 것, 그리고 소통을 잘하는 가족관계라고 생각해요.

가족이 사는 곳은 반포동. 교육열이 대단한 지역이라 엄마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교육 정보가 오가는데, 그녀는 속으로 ‘뭘 저런 걸 다 시키나’ 싶을 때가 많다고. 심지어 못 알아듣는 말도 많아, 옆에 있는 엄마들이 통역 아닌 통역을 해주기도 한다.
“좋은 성적보다는 무엇을 느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변변치 않은 점수를 들고 와도 지난 시험보다 아주 조금 잘했으면 크게 칭찬해줘요. 물론 아이들이 잘하면 좋겠지만, 모든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할 수는 없잖아요. 아직 아이들이 좋아하는 분야를 딱히 찾진 못했지만 찾게 되겠죠. 조급해하지 않으려고요.”
아이들은 놀면서 성장한다는 게 그녀의 교육 철학. 앞으로 본의 아니게 입시 열풍에 시달릴 큰아들 동주가 안쓰러워 얼마 전엔 “우리 청춘을 불살라가며 놀자”라며 학원을 그만두라고 권했다. 그러자 동주가 오히려 “엄마 말대로 살면 내 인생도 불살라질 것 같다”며 단호하게 거부했다니, 성적 때문에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는 다른 집과는 분위기부터 다르다.
“공부는 시킨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억지로 시키면 아이도 스트레스만 받고요. 제일 중요한 건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진 어른으로 자라는 것, 그리고 소통을 잘하는 가족관계라고 생각해요. 남편도 저도, 공부는 재능이라 여겨요. 그래서 아이들 성적이 만족할 수준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편해요. 공부에 소질이 있으면 공부를 하는 게 맞고, 다른 재능이 있으면 그쪽을 키워주는 게 맞죠.”

 

 

베이지 크로스 오버 코트는 코스, 플리츠 디테일의 미디 스커트 세컨플로어.

성교육도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시작했다. EBS 성교육 애니메이션을 주로 시청했는데, 엄마아빠가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것이 곧 성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성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남녀가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해왔다. 큰아들에게 야동 봤느냐고 묻진 않지만, 야동에 등장하는 장면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누나 같은 엄마다.
“아이들이 어떤 직업을 가졌으면 하는 욕심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세대의 아이들이 우리 세대보다 잘살 수 없다고 말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잘살고 싶다는 욕심을 내면 외려 불행할 것 같아요.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면 좋겠어요. 스스로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라면 뭐든 좋아요.”
최근 <엄마가 뭐길래>부터 <은밀하게 위대하게>, <복면가왕> 등 다양한 예능에 출연하면서 별명도 얻었다. ‘신사허당’. 실제로도 엉뚱하고 어리숙하고 허당인 구석이 많다며 몇 가지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저한테 잘 어울리는 별명 같아요. 큰아이 고등학교 오티 때, 사복과 교복 중 뭘 입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한참 고민한 끝에, 교복 입었다고 혼나진 않을 것 같아 입혀 보냈더니 혼자만 교복 차림이었대요. 그땐 인터넷 검색해볼 생각도 못했어요. 요리도 잘 못해서 아직까지 인터넷에 올라온 레시피 많이 참조해요. 간만에 요리해도 정리는 못하는 아내라 결국 남편이 하죠. 그래도 나름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니 꽤 괜찮은 엄마이자 아내 아닌가요?”
사람 말을 잘 믿는 편이라 만약 욕심까지 많았으면 사기 당하기 딱 좋은 캐릭터라는데, 다행히(!) 그냥 속고만 살았다는 그녀. 하지만 일할 때는 더러 까칠하고 예민해진다고. 젊은 시절엔 자신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을 두고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조차 내겐 굴욕이야’ 하고 선을 그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둥글둥글해졌다. 그저 입장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득 그녀는, 그 어느 곳보다 살벌하고 반목과 질투가 넘쳐나는 연예계를 어떤 태도로 헤쳐나왔을까 궁금해진다.
“어릴 땐 저 말곤 다 톱스타였어요. 채시라, 하희라, 유호정, 신애라같은 친구들이 다 톱스타였으니 굳이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죠. 질투하기보단 분명 그 친구들이 저보다 성실하고 잘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부러울 때도 있었죠. 하지만 걔는 걔고, 나는 나니까. 또, 제가 주제파악을 잘해요. 그래서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미련이 없어요. 가끔 아역배우 출신들 중에서 예전에 누렸던 인기에 연연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모습 보면 안타까워요. 지금 할 수 있는 걸 잘하면 좋을 텐데 싶죠.”
에둘러 얘기하자면 그만큼의 절박함이 없었다는 것. 20대 후반 즈음 윤여정은 연기로 힘들어하던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연기가 잘 안 될 때 웃으며 말하니? 다른 애들은 울면서 안타까워하는데.” 대선배가 그런 쓴소리를 하면 대개는 더욱 이를 꽉 깨물고 안타까워할 텐데, 그녀는 “그러게 말이에요” 하며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진짜 윤유선이다.

 

베이식한 그레이 니트는 지고트.

“그만큼 노력하지 않으니 해피한 점도 있어요. 물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단 걸 알아요. 하지만 전 이런 제가 좋아요.”
사람마다 만개하는 시기가 다르다. 20대 때 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년이 되어 빛을 보는 사람도 있다. 배우로서, 여자로서의 욕심을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은 조금 다르다.
“전 그냥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너무 여성스러운 건 부담스럽고, 마냥 편한 사람인 게 좋아요. 배우로선 지금 제 나이에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주목받으면 물론 좋겠지만 그 인기가 계속되는 게 아니란 건 잘 알고 있거든요.”
욕심을 버린 대신 남들이 가지지 못한 지혜와 행복을 터득한 그녀에게는 늘, 지금이, 가장 찬란한 때다.

전 그냥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너무 여성스러운 건 부담스럽고, 마냥 편한 사람인 게 좋아요. 배우로선 지금 제 나이에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주목받으면 물론 좋겠지만 그 인기가 계속되는 게 아니란 건 잘 알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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