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이 한 컷의 사진을 보라. 홍상수의 재킷을 어깨에 걸치고 베를린영화제에서 활짝 웃고 있는 김민희. 만천하에 연인임을 선포한 두 사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들.

 

100년 후 이 사진을 본다면?
1895년의 어느 토요일, 오스카 와일드는 ‘금지된 사랑’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고 2년간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죄명은 남색, 즉 동성연애였다. 심미주의 문학 대표주자의 화려한 삶은 참혹하게 무너졌고 그는 5년 후 세상을 떠났다. 문학인이 생전에 누릴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삶에 대비되는 비참한 죽음은 의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그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말 그대로 살다 간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예술을 모방한 삶, 그리고 그 삶을 다시 모방한 예술을 본다.
근대 이후 예술은 도덕이나 윤리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불륜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내용이 비윤리적이라며 질타하는 사람은 없고, 도덕적 잣대로 작품성을 논하는 것은 무지한 일로까지 여겨진다. 도덕과 윤리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예술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 형사법으로 처벌되던 유형의 남녀상열지사가 민사의 영역으로 넘어왔으며, 따라서 범법행위를 한 것은 아닌 이 두 남녀가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거리낌 없이 받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100여 년 후의 우리가 오스카 와일드를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불운한 예술가로 생각하듯, 이 사진 속의 장면도 100년 후 재평가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굳이 미래학자들의 예측을 빌리지 않더라도 후손들의 시각은 다르리라는 걸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우선 결혼제도가 사라질 것이고, 그와 비슷한 형태의 독점적이고 장기적인 관계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욕망에 한층 가까우면서도 합리적인 관계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들의 시선으로 볼 때는 오스카 와일드나 이 사진 속의 장면이나 비슷한 선상에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사는 우리들 중 상당수에게 이 사진이 마냥 편치만은 않은 이유는 우리 삶이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의 시간을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더 중요한 건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인간의 욕망보다 당장의 험한 세상을 살게 해주는 신뢰와 안정감이다. 대뇌피질의 영역인 성실함을 변연계의 영역인 사랑에 더하겠다는 약속에 편입되는 제도, 즉 ‘결혼’이 아직 남아 있는 이유다.
홍상수, 김민희라는 이 피로한 남의 사랑 이야기에 아주 보통의 삶을 사는 속된 사람으로서 기어이 말을 보태야 한다면 오스카 와일드의 금지된 사랑으로 다친 사람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분명 존중받아야 하고 한 번 한 약속은 깨질 수도 있다. 운명의 사랑을 너무 늦게 만났다고 감정이입을 하자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약속은 지켜지리라 믿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택한 이들이 고루하고 편견으로 가득하다는 회초리질만은 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남인숙(《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 저자)

운명의 사랑을 늦게 만났다고 감정이입을 하자면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를 택한 이들이 고루하고 편견으로 가득하다는 회초리질만은 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 남편의 재킷을 입은 여자?
서른 중반, 지금 내 남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 나와 딸자식을 두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먼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 거다. 우린 어떻게 사느냐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아볼 수도 있고, 네 아이들이 안 보이냐고 반협박을 할 수도 있겠다. 만천하에 내가 아닌 사랑하는 여자와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짓는 남편이 혹시나 되돌아온다 해도 받아줄 순 없을 것 같다. 그건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이며, 치욕스러운 아빠의 존재를 부정하는 엄마로서의 소심한 반격일 테니까. 그리고 남은 내 삶과 아이들을 위해 냉정히 위자료를 요구할 테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일모레 환갑잔치를 할 무렵 이런 일을 겪는다면? 남편이 스물두살이나 어린 여자와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다면 난 아마 ‘늙어서 노망난 놈’쯤으로 생각할 듯하다. 초라해져가는 육체를 지닌 부부에게 아름다운 성적 매력은 한낱 과거형이 되어버린 지금, 새파랗게 젊은 미혼의 성과 마주한다면 분명 노인에겐 탐하고 싶은 대상일 테니 말이다. 아내의 입장에선, 쇠퇴하는 노인의 성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김민희는 비위가 대단히 좋은, 한마디로 ‘난 여자’란 생각이 든다. 비록 홍상수가 세계 유수한 대학을 졸업한 지성을 갖추고, 사회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감독인 데다 통장에 몇천억 재산이 있다손 치더라도 한 이불을 덮었을 때 느껴지는 노인의 피부와 성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가정 있는 남자의 품에 안기는 담대한 여자, 대중의 사랑 대신 한 남자의 손을 잡은 용기, 노인의 성을 사랑이란 이름 안에 포함시킨 너그러움. 그 모든 것을 갖춘 여자라면 “그래, 너 한번 인생 그렇게 살아봐라”고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저물어가는 황혼에 심적 안정을 줄 수 있을 테니까. 간통죄가 폐지된 2017년 이 시대에 연인임을 공개한 둘을 두고 불륜이니 로맨스니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라 믿는 한, 그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마다 더욱 뜨거워질 게다. “젊고 잘생긴 남자 만나봤지만 다 부질없다”고 말하던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영희(김민희)의 대사처럼, 그 부질 있는 사랑은 어떻게 결론이 날지 궁금하긴 하다.

-이영민 피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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