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대한민국 판사님

엘리트 중의 엘리트, 재판정 가장 높은 법대에서 판결을 내리는 판사. 공정한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을 하지만 왠지 우리와는 딴 삶을 사는 사람들인 듯 위화감도 들고 부정적 시각도 적지 않았다. 알고보니 정의롭고, 따뜻하고, 친근감 넘치는 판사님들은 이미 우리 곁에 많이 있었다. 세상이 다 아는 프렌들리 판사들을 만났다.

 

 

소년범들의 아버지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천종호

대한민국 학교폭력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SBS 다큐멘터리 <학교의 눈물>에서 가해자 청소년들에게 호통을 치고, 미성숙한 부모에게 큰 가르침을 안겨준 천종호 판사. 그에게는 ‘만사소년’, ‘바보판사’, ‘호통판사’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소년 재판을 맡을 때는 피고가 된 아이들이 성장해 건전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년 보호처분이 최대 2년인데, 어떤 모습으로 출소할지 모르거든요. 그간의 죄를 반성하는 편지라도 받으면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안 오는 아이들도 많아요. 그런 아이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면 걱정이 많이 됩니다.”

천 판사가 유독 소년범들에게 마음을 쏟는 이유가 있다. 그 역시 부산의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아이들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누군가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면 그게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천 판사는 아이들이 다시 나쁜 길에 빠지지 않고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정이 회복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개별 가정의 문제를 다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일. 아이들에게 사회성을 길러주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한 그는 결손가정의 비행소년들을 위해 보육원, 고아원이 아닌 또다른 가정인 ‘사법형 그룹홈’을 제안했고, 현재 ‘청소년회복센터’라는 이름으로 전국 17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부족한 국비지원 등 열악한 실정에 천 판사는 사비를 쏟아붓기도 하고 자신이 펴낸 책 두 권의 인세를 모두 기탁하는 등 물심양면 지원하고 있다.

 

“나무가 어릴 때 햇빛을 따라 굽으면 다시 똑바로 세우기 힘들듯, 가정에서 방치된 아이들은 쉽게 회복되지 않아요. 저도 보람보다 좌절한 경우가 많거든요. 신창원이 그랬잖아요. 초등학교 선생님이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해줬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저도 법정에선 엄하지만, 밖에서 소년들을 만나면 따뜻하게 대하려 노력해요. 그래서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도 해요. 도서상품권을 늘 가지고 다니면서 선물로 주거든요. 현금 주면 담배 사서 피우니까. 하하.”

소년 범죄는 가정에서 부모 개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함께 해결 해나가야 할 문제라는 게 천 판사의 생각이다.

“인간 사회는 더불어 자라는 숲이에요. 나무를 키우기 위해 간벌을 하지만, 인간 사회는 간벌이 불가능한 ‘함께 가야 하는 사회’거든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나도 안전하고 타인도 행복해져요. 어른이라면 자기가 가진 걸 조금씩 내놓으면 좋겠어요. 재능, 부, 지식 등 어떤 것이라도요. 어른들이 먼저 그렇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
판사 출신 소설가 변호사 도진기

 

두 달 전 서울북부지법에서 20년 판사 생활을 접고 새 출발을 시작한 도진기 변호사는 7년 만에 3편의 미발표 소설까지 합해 총 12권의 소설을 쓴 역량 있는 스토리텔러. 그의 작품 중 앞으로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될 것만 해도 3편이나 된다. 노동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판사생활을 하면서도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주말엔 집에서 작품을 썼다는 그는 ‘한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로 통한다.

“어릴 때부터 무협지와 만화를 많이 봤어요. 덕분에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판사 생활할 때도 좀 튀는 편이었죠. 간통죄 무죄 판결을 내린 것도 이슈가 됐고, 스페인으로 연수 간 것도 파격이었죠. 법리를 치밀하게 다투는 판사 일도 적성에 맞았지만 그와 반대로 호기심 많고, 자유분방하고 재미있는 걸 추구하는 기질도 있는데 그게 저를 소설가의 길로 이끈 듯합니다.”

판사 재직 중에는 누가 봐도 명백히 범인이지만, 법의 논리와 절차상 어쩔 수 없이 무죄 판결이 날 수밖에 없는 답답한 경우도 더러 마주했다. 현실 법정에서 불가능한 일을 글로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 통쾌함을 느낀다는 그는 20년 법정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속 캐릭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판사와 작가는 공통점이 있어요. 외부에서 비판이 들어오면 자신만의 논리로 방어를 하거든요. 비판적인 독자로 보낸 시간들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돼요. 판사가 관례적으로 당연히 내리는 판결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더라고요. 앞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메시지를 담는 건 그 다음이죠. 소림사도 무공이 중점, 2순위가 불공이라잖아요.”

법조인으로서의 바람이 있다면 감정보다 이성이 앞선 사회가 됐으면 하는 것. 더불어 작가로서는 그의 작품 중 《유다의 별》에서처럼, 앞으로 광신적 행태를 보이는 극단적 사회에 대해 경고를 보내는 책도 쓰고, 보편적 도덕률이나 기준 등에 대한 연구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비친다.

“제 꿈은 단연코 대중적 성공입니다. 작품이 널리 읽히고 다양한 미디어로 전달되면 좋겠어요. 코난 도일이 만든 ‘셜록 홈즈’라는 불멸의 캐릭터처럼, 일본의 긴다이치 코스케와 명탐정 코난처럼, 도진기가 만들어낸 캐릭터도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큼 유명해지고 사랑받도록 노력해야죠.”

 

다섯 아이의 엄마 판사
인천가정법원 부장판사 신한미

이혼, 상속재산분할, 소년사건 등 가족 구성원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여러 사건을 주관하는 가정법원. 판사 임용 후 지금까지 약 15년 동안 줄곧 가정법원을 지켰던 신한미 판사는 사건을 통해 가정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가정법원에서 다루는 사건은 서로 연관이 돼요. 소년사건으로 만난 아이의 부모님을 나중에 이혼 법정에서 만나고, 가정폭력 사건으로 만난 부부가 후에 이혼까지 가기도 하고요. 모든 사건들이 돌고 돌아요. 가정법원 안에 있으면 왜 가정이 모든 일의 중심인지, 또 왜 이혼도 잘해야 하는지 느끼게 됩니다.”

행복한 가정에 관한 기준이 누구보다 명확한 신 판사는 고3부터 초2까지 다섯 아이를 둔 엄마다. 그냥 아이들을 좋아해 ‘어쩌다보니’ 12년간 아들 셋, 딸 둘을 낳은 그는 법조계에서도 유명한 다둥이맘. 야근은 기본, 지방근무 등 노동 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판사가 아이 다섯을 키우기란 녹록지 않은 일일 텐데, 남편부터 시어머니, 어린이집, 도우미 등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버텨냈다. 전주에서 근무할 땐 주말마다 아이들을 떼놓기가 너무 힘들어 둘을 전주로 데려와 홀로 키우기도.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부부는 사랑에서 시작될지라도 가정이란 단위가 되면 신뢰가 제일 중요한 요소가 돼요. 실제 가정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불신에서 비롯되거든요. 저와 남편(강인구 변호사) 또한 늘 믿음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결혼 후에는 한쪽 눈을 감고 다니라’는 영국 속담처럼 웬만한 허물은 믿고 덮어주죠. 비단 부부뿐 아니라 아이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바라기보단 내가 뭘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하면 싸울 일도 줄어들어요. 해야 하는 일에 선을 그어놓지 않고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면 불화의 씨가 싹트지 못해요.”

여러 재판 중에서도 소년 재판에 들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쓰릴 수가 없다. 다섯 아이 엄마로서 감정이 이입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혼 사건도 마찬가지. 신 판사는 남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방향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최대한 지켜주는 게 그의 몫이라고.

“대전 가정법원에 있을 때 어른과 아이가 일대일로 멘토와 멘티 관계를 맺어 한 달간 여행을 떠나는 ‘길 위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지리산 둘레길을 9박10일 함께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저와 함께 한 아이가 1999년생으로 제 큰아들과 동갑이라 더욱 남달랐어요. 덩치는 어른인데 생각은 아이였죠. 부모가 이혼한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엄마를 기다린다면서 같이 살고 싶다고 하더군요. 이런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변함없는 환경 탓에 다시 범죄를 저지르기 쉽죠.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면 늘 짠해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는 부모가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신 판사는 가정이 따뜻해야 아이들이 겉돌지 않는다고 일침한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아이의 성향을 파악하고, 아이에게 맞는 대화를 나누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부모 관점에서만 보면 안 돼요. 상황이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세요. 자신을 위해 준비된 따뜻한 밥 한 그릇만 있어도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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