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 다녀왔습니다

혼술이 유행이라는데, 쭈뼛쭈뼛할까 고민하신다면, 삼일 밤, 혼자 술푸러 다녀 온 유부녀 에디터의 체험기에서 용기를 얻어보세요. 핫하다는 세 곳을 다녀왔습니다.

기분 꿀꿀한 저녁이다. 전날 밤 한바탕 한 뒤로 남편은 오늘 내내 밥 먹었냐는 흔한 문자 하나 없다. 한번 해보자는 거지. 때마침 아이들도 시댁에 보낸 터라 더더욱 집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우울한 기분에 문득 술 생각이 간절해진다. 평일 밤에 친구와 술잔을 기울였던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래, 오늘 제대로 달려보자! 하지만 누구에게도 선뜻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결혼한 친구들은 아이와 복작대며 저녁을 보내고 있을 게 분명하고, 미혼인 친구에게 연락하려니 느지막이 시작한 연애를 차마 방해할 수가 없다. 그냥 집에 가서 주말에 사둔 맥주나 마실까 하며 회사 문을 나서다 문득 까짓것 혼자 먹어보자 용기가 샘솟는다. 이왕 마시는 거 요즘 가장 핫한 바 세 곳을 한번 가보자고!

 

<출처> 글래드라이브호텔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회사 맞은편 글래드라이브 호텔 라운지바 ‘디맨션’.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쿵쿵’ 클럽 음악이 들린다. 3층에서 내뿜는 화려한 핑크 레이저를 확인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직감했다. ‘이곳은 나를 반기지 않는다!’ 20대 초반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아슬아슬한 길이에 몸매가 드러나는 블랙 원피스를 입고 있다. 아, 여기 지하에 요즘 잘나가는 애프터 클럽 ‘디스타’가 있었지. 핑크색 소파에 앉아 고깔모자를 쓰고 생파를 하거나 여고동창 모임을 하는 듯 시끌벅적 들뜬 분위기. 주변을 물색하는 승냥이들도 더러 눈에 띈다. 위스키를 한잔 마셔볼까 했지만 분위기상 칵테일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자리를 잡고 애플마티니를 주문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한 바텐더가 활기차게 셰이커를 흔들어 칵테일을 내놓았다. 그러곤 우울한 아주미에게 신경을 쏟기보단 옆자리에 앉은 여자들이 부탁한 사진을 찍어주기 바빴다. 술을 어디로 마셨는지 모르겠다. 시끄러운 클럽 음악을 계속 듣다가는 정신줄마저 놓아버리겠다 싶어 서둘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디맨션 ★★☆☆☆
바텐더 아닌 웨이터 느낌. 여자친구 생파 장소로 OK. 아줌마가 낯선 라운지 클럽 분위기, 조용히 혼술을 즐기기엔 NG.

 

 

이번엔 프라이빗한 분위기로 정평이 난 청담동 ‘볼트82’로 향했다. 묵직한 출입문을 밀자 1층의 남자가 “혼자 오셨어요?”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지하로 안내한다. U자 계단을 내려가자 마치 해리포터의 비밀의 방 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조명이라곤 테이블에 놓인 작은 등과 위스키로 꽉 채워진 백바의 불빛이 전부. 몸에 꽉 맞는 슈트를 입고 시가를 태우는 남자의 무리,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커플들이 묵직한 재즈 음악 안에서 위스키를 마시고 있다. 커플들 사이, 겨우 하나 남아 있는 바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바텐더는 친히 의자를 빼서 넣어준다. 부담스럽게. 하지만 몸을 푹신하게 감싸는 넉넉한 빈티지 소파가 꽤 위안이 된다. 노련해 보이는 세 명의 바텐더 가운데 나의 서버는 20대 후반쯤으로 보인다. 흰 셔츠에 멜빵을 멘 단발머리의 그는 마치 70년대 뉴스페이퍼 보이를 연상시킨다. 그는 메뉴리스트와 함께 크래커, 바질페스토를 밀어준다. 첫잔은 가볍게, 위스키바니까 위스키를 베이스로 하는 칵테일 맨해튼을 주문했다. 한 모금을 마시니 그가 묻는다.
“맛은 괜찮으세요?”
“네.”
그러고는 대화가 끊겼다. 남은 술을 홀짝홀짝 다 마셨다. 김렛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술 드시러 혼자 다니세요?”
“아뇨, 오늘 처음이에요.”
“여자분이 혼자 오신 건 처음이에요. 혹시 안 좋은 일 있으세요?”
“남편이랑 싸웠거든요.”
“결혼한 지 몇 년 되셨어요?”
“……”
“친한 형들도 결혼하니 힘들다고 저더러 결혼하지 말래요.”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바텐더의 라이프스토리로 이어졌다. 2010년 스무 살 때부터 칵테일 쇼를 하는 동네 작은 바에서 일한 바텐더 총각은 제대 후엔 다른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어쩌다보니 전문적으로 술공부를 하게 됐다고 한다. 몇 년 전엔 세계적인 바텐더 대회에 출전해 코리아 톱 10 안에 들었다고 깨알 PR까지 빼놓지 않더니, 나중에 자기 바를 갖는 게 꿈이라는 말까지 털어놓는다. 하지만 이곳도 노스모커인 여자가 혼술을 즐기기에 좋은 바는 아니다. 옆자리의 남자는 쉴 새 없이 시가를 피어댔고, 테이블석에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업된 상태여서 소란스러웠다. 게다가 바텐더는 혼자 온 여자를 혼자 둬선 안 된다는 의무라도 있는 양 애써 대화를 이어나갔다. 불편하진 않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저기, 조용히 마시고 싶어요.”
용기를 내어 말하니, 눈치가 없었다며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준다. 얼마 후 내 옆자리 커플이 나가고 그 자리에 20대 여자 둘이 앉았다. “한잔 줘” 하고 말을 놓는 것을 보니 바텐더와 꽤 친한 사이인 게 분명했다. 2차로 이곳에 온 그녀들은 깔깔대며 바텐더와 일상을 주고받았다. 남편과 간만에 분위기 낼 때 제격이겠다는 판단과 함께 카드를 내밀었더니 매니저급으로 보이는 바텐더가 묻는다.
“충분히 드셨어요?”
“아뇨. 두 잔이 충분할 정도는 아니죠.”
“술은 한 잔이라도 만족감을 느끼는 게 중요하잖아요. 다음엔 이곳에서 충분히 드시길!”
영수증엔 서비스차지 1만원이 붙어 있다. 전혀 취하지 않았으니 이대로 끝낼 순 없다.

볼트82 ★★★☆☆
럭셔리 프라이빗 플레이스. 남편과의 데이트 장소로 추천. 무겁고 중후한 남성적 분위기, 여자 혼자 마시기엔 So So.

 

 

<출처> 와이낫

다음 행선지는 그나마 익숙한 한남동의 ‘와이낫’. 볼트82보단 캐주얼한 분위기다. 밤 12시가 넘었지만, 바에는 혼자 마시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커플이 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밤이 더워지네요” 하고 말을 건네는 바텐더가 작년에 왔던 나를 기억하는 줄 알았다. 사이드 자리에 앉으니 따끈한 웰컴티를 내온다. 메뉴리스트 첫 페이지엔 이곳의 규정이 친절히 적혀 있다. 1인당 5천원 기본요금, 다른 손님과 합석, 부킹, 대신 계산 불가능. 마음에 든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바텐더에게 위스키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즐기는 위스키 있으세요?”
“집에서 먹어본 건 글랜피딕이나 맥캘란 정도밖에 없어요. 잘 몰라요.”
그러자 위스키 보틀을 가져와 눈앞에 정렬한다.
“요즘 인기 있는 위스키들이에요. 발베니는 추가 숙성을 거쳤기 때문에 달콤하고 부드러워요. 여성들이 좋아하죠. 만약 묵직한 걸 좋아하시면 달모어를 드셔보세요. 와인통에서 숙성돼 향이 강해요.”
그리곤 시향까지 돕는다. 위스키보틀을 한 바퀴 돌리더니 코르크마개를 따 건넨다. 묵직한 몰트향이 기분 좋다. 뿔이 달린 사슴 로고가 새겨진 달모어는 국내에서 잘 볼 수가 없다는데, 생각해보니 영화 <킹스맨>에서 슈트를 빼입은 콜린 퍼스가 이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 나왔다.
“달모어로 주세요.”
듀크 엘링턴의 ‘데이 드림(DAY DREAM)’이 흘러나오고, 한 잔의 술에 꽤 기분이 좋아진다.
“퇴근하는 길이세요?”
“네. 혼자 오신 분들이 많네요.”
“평일엔 여자분들도 혼자 많이 오세요.”
두부과자, 닭다리과자, 크래커 등 옛날과자 3종은 기본 안주. 서비스 과일도 내준다. 다이어트와 취미생활에 대한 시시껄렁한 대화가 이어졌다 끊겼다를 반복했다. 막냇동생 같은 젊은 바텐더는 닭다리과자만 골라 먹는 걸 알아채고는 따로 소복하게 담아주는 센스까지 발휘한다. 그렇게 달모어 두 잔을 더 마시고 일어섰다. 이곳은 너무 격식을 차릴 필요도, 그렇다고 옆자리의 파티 분위기에 위축감을 느낄 일도 없다.

와이낫 ★★★★☆
적당히 편안한 위스키바에서 과하지 않은 매너의 바텐더를 만나고 싶다면 추천. 친동생 같은 바텐더, 캐주얼한 분위기에 혼술 강추. 그런데 내 앞에서 설거지를 한 건 너무했어.

 

 

혼자 술을 홀짝이는 시간, 나쁘지 않다. 퇴근길에 혼자 한잔하고 들어오시던 아빠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위스키바에 정통한 친구는 혼술하기 좋은 바를 몇 군데 더 추천해주었다. 좌석이 12개뿐인 경리단길의 작은 바 ‘트웰브’는 말발 좋은 바텐더가 있어 퇴근길에 칵테일 한잔하는 아지트 같은 곳, 간판도 없고 주소를 밝히지도 않는 스피크이지바 콘셉트의 한남동 ‘더 부즈’는 실력파 바텐더들의 노련미와 자부심으로 유명한 곳이란다. 연남동의 ‘31b’는 프로혼술러들의 성지로 불리는 곳인데, 미녀사장님이 위스키 입문자를 위해 친히 코스를 짜주기 때문에 남자 바텐더가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추천한다. 물론 유명한 바텐더가 상주하거나 컨셉추얼한 위스키바를 투어해도 좋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격식 차리지 않고 편안하게 위스키 한 잔 털어넣을 수 있는 캐주얼 바가 아닐까. 가끔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날, 혼술을 하고 싶다면, 홈그라운드를 기점으로 바텐더와 편하게 수다 떨 수 있는 단골 바를 만들어 호핑하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한 잔의 위스키와 마주하는 공간은 때론 아지트, 때론 도피처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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