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으로

30년간 음악이란 좁은 울타리에서 갇혀 지냈던 박선주가 비로소 넓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결혼과 출산 후 매일이 황홀의 연속이라는 그녀는 삶의 방향을 되찾은 듯하다. 딸 에이미와 함께한 엄마 박선주의 어느 날 오후.

박선주가 입은 스카이블루 컬러 롱드레스 로우클래식, 화이트 스트랩 슈즈 레이첼콕스.
에이미의 옐로 롱드레스 미미씨엘.

결혼은 미친 짓이라지만, 누군가에겐 행복의 발화점이 된다. 괴테는 결혼을 모든 문화의 시작이며 정상이라 했다. 난폭한 자는 온화하게 만들고 교양 높은 사람은 온정을 증명하는 최상의 기회라고. 이는 아마도 박선주에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다시피 결혼 전 걸크러시의 대명사 격이었던 박선주는 까칠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음악이란 분야 안에서는 최고 실력파 뮤지션으로 인정받았지만 그 외의 것에는 관심도 여유도 없는, 뾰족하게 날이 선 사람으로 통했다. 그녀가 달라진 데는 결혼이 결정적이었다. 6년 전 셰프 강레오와 갑작스레 결혼을 발표하고, 몇 달 뒤 딸 에이미를 낳으면서 박선주는 엄마가 되었다. “음악 외엔 아무것도 없었던 저에게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모든 게 새로웠어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랄까. 인간관계부터 가정, 아이의 성장 등 모든 것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사소한 순간순간이 모두 큰 축복으로 다가와요.” 딸의 손을 잡고 나타난 박선주에게선 고집스러운 뮤지션, 엄격한 프로듀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구나 엄마가 되면 그러하듯, 따뜻하고 포근하고 배려심이 가득했다.

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가수 박선주에 대한 고정관념이 산산조각 나는데요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요. 평소에는 더해요. 슬리퍼에 머리 질끈 묶고 나가 장 보는 아줌마거든요.
결혼과 출산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나요
사실 처음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니 자괴감을 느낄 만큼 상황 파악이 안 됐어요. 몇 년 지나고 나니 이제야 할 만하단 생각이 드네요. 지금껏 남편과 아이에게 많이 배우면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죠. 예를 들어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선 박선주란 사람은 없어지고 에이미의 엄마로서 다른 엄마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죠. 새로 부여받은 역할 안에서 인간관계를 맺고 어떤 가치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새로워요. 저와 20년간 음악을 해온 친구가 있는데, 제가 유치원 입학 설명회 때문에 처음 본 엄마들과 통화하는 걸 듣곤 정말 놀라더라고요. 엄마들은 정보 공유를 하면서 친해지는데, 그게 제게도 익숙한 일이 되었어요. 또 성격도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보다 여유로워지고 온화해졌다던데요. 그전엔 독설도 많이 하고 까칠했잖아요. 여자보단 형이란 단어가 익숙했는데, 주변에선 편안해 보이는 지금의 제 모습이 아주 좋대요.

 

이런 변화는 남편 강레오씨 덕분인 거죠
이런 얘기하면 또 욕 먹을 텐데. 하하. 사실 남편의 배려가 굉장히 컸어요. 아이 낳고 집에서 6개월쯤 있었더니 저한테 “이제 엄마 코스프레 적당히 하고 ‘박선주’ 하러 나가봐” 하더라고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격려해줬어요. 제가 일할 땐 방해될까봐 전화도 잘 안 하죠. 남편이 저한테서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나 녹음실이야”거든요. 상대가 저를 믿고 배려해주니 삶 자체가 따뜻해진 것 같아요.
6년 전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센 사람들이 만나 잘 살까’ 하는 우려도 있었어요
자주 싸우기는 하는데 감정적으로 부딪친 적은 없어요. 대화를 많이 하다보니 말이 길어져 사소한 단어 때문에 싸우게 되거든요. 어찌 보면 토론이죠. 화해도 길게 끌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싸움이 오래가지 않아요. 그때그때 정답을 얘기하면 바로 수용하고 마무리해요. 둘 다 사회생활을 오래해서인지 싸울 땐 회의하는 느낌도 나고, 서로를 남녀가 아니라 상사와 부하처럼 보는 것 같기도 하고요.
누가 상사인가요
딱히 제가 상사라고 생각진 않지만, 강레오씨는 본인이 부하라고 해요. 적당히 하지 않으면 노조를 결성하겠다면서요.
이번 싱글앨범 <라라 소울(La la soul)>의 작사가 이름에 딸 에이미가 있던데요
에이미가 하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놀라워요. 말을 배울 때는 정해진 틀이 없기 때문에 어른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단어와 표현을 쓰죠. 에이미는 “엄마, 마법을 걸어서 우주를 걸어 다닐 거야”, “바람친구가 에이미 머리를 쓰다듬어줘서 기분이 좋아” 등등 보석 같은 표현을 건네요. 그때마다 메모를 해뒀죠. 언젠가 <헤이 주드(Hey Jude)>처럼 아이에게 선물하는 노래를 쓰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쓰게 돼 기분이 좋아요.
어른이 아이에게 배울 때가 많죠. 특히 아이 보는 앞에선 나쁜 짓도 못한다잖아요. 에이미로 인해 달라진 가치관이나 행동이 있나요
그동안 저란 사람은 오늘만 살았어요. 지금 잘하는 게 중요했죠. 그래서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생각지 못했어요. 하지만 계속 성장하는 에이미를 엄마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면, ‘나에게도 저런 과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과거를 되돌아볼 줄 아는 태도를 배운 것 같아요. 또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게 됐어요. 사실 공인의 삶을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압박의 연속이에요. ‘열 명 중 한 명만 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려 해도 쉽지 않거든요. 한데 아이들은 다르잖아요. 어느 날은 에이미가 자기랑 친구 하기 싫다는 아이에게 말했대요. “그럼 다시 친구 하고 싶을 때 얘기해줘.”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한 거 같아요. 매일 아침을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한 압박과 두려움으로 시작하는 저와 달리 아이는 아주 행복해하며 하루를 시작하죠. 그런 아이를 보면서 ‘좀 못하면 어때’ 하며 일상을 너그럽게 생각하게 됐어요. 덕분에 주변 사람들도 덜 괴롭히는 것 같고요.

 

박선주가 입은 스트라이프 셔츠와 실버 스커트 렉토, 실버 싱글 이어링 넘버링.
에이미가 입은 화이트 컬러 원피스 봉쁘앙.

에이미를 ‘내 딸’이 아니라 한 인격체로 동등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부부의 육아 철학이 있다면
남편과 제가 에이미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어요. “엄마와 아빠는 가족이지만, 넌 언젠가 다른 가족을 만날 거야. 그렇게 독립하기 전까지는 우리 가족 안에 함께 사는 거란다.” 에이미가 스스로 할 수 있으면 그대로 지켜보는 편이에요. 섣불리 도와주지 않고요.
엄마로서 아이가 이렇게 컸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주관이 확실한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어요.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성장해 다른 사람을 존중해주는 사람, 배려심 깊은 사람이 되면 기쁠 것 같아요. 또 의지도 있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좋은 에너지를 줄 수 있다면 더 좋고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부모 자식 사이에 쿨한 관계를 유지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잖아요. 애지중지하면서 기대하고 원하게 되니까요.
혹시 성장하면서 부모님께 그런 영향을 받았나요
삼남매 중 외동딸이었는데, 어머니가 아들 둘에게만 신경 쓰셨기 때문에 전 자유롭게 살았어요. 그게 행운이었죠. 저 혼자 깨닫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고, 그 덕분에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에이미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고 싶었나봐요. 언젠가 갤러리에 함께 갔는데, 에이미가 잠깐 혼자 생각하고 싶다더군요. 가끔씩은 음악을 들으며 생각할 때도 있고요. 우리 가족이 평소에 생활하는 패턴도 같은 맥락이에요. 굳이 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 경우가 드물어요. 저와 에이미, 에이미와 남편 등 자연스레 일대일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죠.
세 사람이 함께 집에 있을 땐 어떤 모습인가요
남편도 저도 한창 일할 나이라 서로 얼굴 보기도 쉽진 않아요. 주말에는 함께 있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남편은 영화 마니아고 전 책 마니아예요. 또 에이미는 미야자키 히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라면 일본어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광팬이고요. 그래서 셋이 각자의 취미를 즐기고 식사도 자유롭게 하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렌지 커팅 디테일 재킷 포츠 1961, 화이트 니트 롱드레스 델라라나,
진주 롱 드롭 이어링 스톤헨지.

에이미는 아빠의 외모를 꼭 닮았는데, 성격은 어떤가요
역시 아빠 닮았어요. 차분하거든요. 전 감정 폭이 굉장히 넓은데, 남편은 마치 심장제세동기가 멈췄을 때처럼 한결같아요. 아무리 늦어도 뛰는 법이 없죠. 대신 늦지 않게 늘 부지런하고 자기관리가 철저한 편이에요. 저희 부부는 기본을 제외하곤 다 달라요.
음악과 요리는 어찌 보면 같은 예술 분야인데, 어떻게 다른가요
음악은 채우는 미학이에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고독하고 고집스러울 수밖에 없죠. 반면 요리는 저마다 취향이 다른 사람들의 입맛을 맞춰야 하다보니 많은 사람과 만나야 해요.
셰프의 아내로서 요리는 좀 하시나요
그냥 가정주부 수준이에요. 어쨌든 미슐랭 스타 셰프에게 밥을 줘야 하니 공부를 좀 했죠. 처음엔 식은땀 날 정도로 긴장했는데,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실력이 많이 늘었죠. 평소에도 이연복 셰프님이나 레이먼킴 같은 지인들을 만나다보니 정보도 많이 얻어요. 또 새로 오픈하는 레스토랑의 테이스팅도 하다보니 저절로 늘더라고요.
주방은 자연스레 아내 차지인가봐요
결혼하면서 정한 원칙이 있어요. “난 집에서 노래 안 할 테니, 당신도 집에서 요리하지 마.” 전 지인들과 노래방 가는 게 싫어요. 남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집에 와서 주방에 들어가면 일하는 기분일 테니까요. 그래서 장도 제가 직접 봐요. 남편이 냉면과 비빔국수를 좋아하는데, 몇 년간 자주 만들다보니 요즘엔 장사해도 되겠다며 칭찬을 해요. 요리를 전혀 몰랐는데, 남편 덕분에 취미를 붙이게 돼 고마워요. 제가 참 많이 달라졌네요. 하하.

 

에이미가 입은 핑크레이스 원피스 미미씨엘.

싱어송라이터에다 프로듀서이고, 또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치고 있어요. 새벽 작업이 많은 워킹맘인데, 가정에서의 역할도 밸런스를 잘 맞추며 사는 것 같아요
저 스스로 훌륭한 엄마나 아내, 또 주부생활을 완벽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더욱더 노력하는 면이 있어요.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내게 주어진 임무를 잘 완성하고픈 마음이랄까요. 바쁘게 일하면서도 가족을 잘 챙기고 싶죠. 다행히 나이 들수록 잠이 없어져서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어요.
박선주가 걷고 싶은 인생의 방향이 궁금해요
조금 거창한 말이지만, 저 스스로 한 가지 약속했어요. 꼭 음악가로 죽겠다고요. 제 장례식에 음악 하는 사람들이 와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파티하며 즐겁게 노는 광경을 십대부터 꿈꿨어요. 그래서 환갑 기념 디너쇼에 요리를 부탁하려고 강레오와 결혼했다고 말하죠. 천생 음악가 박선주로 기억되고 싶고, 그 꿈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어요. 또 하나는 에이미죠. 제가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 딸을 낳은 게 아닐까 싶어요. 가족을 이루고 나서 욕심이 하나 생겼다면 에이미가 어느 분야든 사람들과 좋은 것을 공유하는 예술가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요즘은 제 소망을 담은 씨앗을 뿌리는 기분이 들어요. 에이미가 예술로 밝고 행복한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면 좋겠어요. 전 그 꿈을 실현할 수 있게 잘 도와주고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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